아마도 처음 절을 세웠을 때는
처마끝의 나무에 그려넣은 단청이 선명했겠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단청의 색이 많이 바랬습니다.
절에선 그걸 그냥 방치해 두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버려둔 세월이 더 보기에 좋습니다.
단청이 벗겨진 자리에선 세월이 함께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보이면 그 세월의 길이만큼 많은 기억이 함께 보입니다.
아마 지난 여름 심하게 들이치던 어느 날의 비바람도 그 기억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느 해 처마밑을 파고들던 노곤한 봄볕도 분명 그 기억 속에 있을 겁니다.
단청의 색이 선명하여
꽃의 문양이 그 자리를 분명하게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 문양에 시선을 뺏길 뿐,
바로 어제 그곳을 지나친 저녁 햇살을 기억해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다 단청이 바랠 정도로 세월이 흐르면
나무는 한동안 꽃의 무늬에 내주었던 세월을 되돌려 받게 되죠.
나무가 세월을 되돌려 받으면
아득하게 잊혀졌던 나무의 색이 드러나고
또 나무의 문양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떠오르게 됩니다.
단청으로 단장한 말끔했던 처마끝에서 세월이 흐르고
그리하여 단청이 바랜다는 것은
알고보면 나무가 세월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바래면 바랠수록 나무는 처음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습니다.
5 thoughts on “나무와 단청”
4학년때, 선택으로 한국건축을 들었어요.
서양건축(史) 2과목은 필수였는데, 우리전통건축은 선택이었죠.
암튼, 강의 마지막 부분에 ‘단청’을 다루었는데
이 단청의 세계가 너무 오묘해서 저는 거의 포기수준이었습니다.
전문서적 한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어려운, 하나의 학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는게 단청이었습니다.
‘어찌 그대를 五색이라 말할 수 있는가?’
단청만 찍으러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면
단청하나만 보고도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앎의 즐거움이란 참으로 무궁무진한 듯.
그동안 단청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보질 못했네요…
한동안 절마다 확장의 일환으로 다 같은 색으로 덧칠하는 느낌이 들어서 새로 단청한 절을 보면 괜히 마음이 안좋더라구요.
단청의 의미를 모르고 겉만 보니까 그렇군요…ㅜ.ㅜ
본래의 나무와 그 위에 덧칠해진 꽃, 나무와 꽃에게 있어서도
역시 화합의 코드는 ‘시간’이군요.
영주의 부석사에 갔을 때도
단청이 모두 바랬던 것을 본 기억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