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밀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이영애이다.
탤런트와 이름이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탤런트 이영애보다 열배는 더 예쁘다.
아이의 이름은 승현이다.
나는 자유롭다. 내가 자유롭다고 말했을 때의 자유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마음먹은대로 걸어다닐 수 있고 손을 놀릴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말함이다.
10월 23일 일요일, 나는 한영교회의 사랑부란 곳에서 주최하는 한 행사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랑부는 장애인 봉사부서이다.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그날 내가 찍은 사진은 무려 1800장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날 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원없이 사진을 찍었다는 분명한 반증이다. 다리와 손의 자유없이는 결코 1800장의 사진이 주어질 수 없다. 그렇게 나는 그날 내가 사진찍을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자유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봉사자들의 몸은 자유로웠지만 그 봉사에 기대고 있던 장애인들의 몸은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었지만 그날 사진에 담긴 아이들의 몸은 자유롭질 못했다.
곰곰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내가 이렇게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나고 그들이 그렇게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선 어떠한 합리적 이유도 찾을 수가 없다. 왜 누구는 이렇게 태어나고, 누구는 저렇게 태어나는 것일까. 질문은 던질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합리적 대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세상은 불공정하기 짝이 없다. 이번 행사가 교회의 한 부서에서 주관한 행사였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아무래도 공정과는 거리가 먼느낌이다. 그들이 곧잘 하는 말, “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라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내겐 거의 설득력이 없다. 나는 그 말이 장애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는 말로 들려, 장애인의 부자유를 접할 때마다 제발 그 예비좀 안하시면 안돼나하는 생각을 갖곤 했다.
그러다 이번 행사의 사진을 정리하면서 내 머리 속에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혹시 나의 자유가 모두 내가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는 그들과 나누라고 주어진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언젠가 최일도라는 목사가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밥퍼 목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며, 그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엄청난 양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때 그는 처음에 책이 잘 팔리면서 인세가 1천만원이 들어오고, 그것이 다시 3천만원이 될 때까지만 해도 그 돈이 자기 돈 같더니 인세가 1억을 넘기고 2억을 건너뛰자 그때부터는 그것이 자기 돈 같이 여겨지지 않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나는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번에는 행사가 야외에서 마련되었고, 아이들이 흩어지질 않아 한자리에서 집약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는 사진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맘껏 누리고 보니 나의 그 자유가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들이 사진을 찍어주는 내게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내 생각이 맞아서 내 자유의 일부가 그들의 몫이라면 그들은 내게 고마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고마워하기 보다 어느날 어디로 와서 자신들의 사진을 찍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 몫의 자유는 내게 있지만 그것은 내 생각에 불과할 뿐. 이번에도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고마워했고, 나는 내게 고마워하는 그들에게 내심 미안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가끔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불편을 내세워 장애인들과 함께 하길 꺼리고 기피한다. 그러나 그들의 보행을 막으면 자유가 이중으로 막힌다. 하나는 그들이 누려야할 그들 몫의 자유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 몫의 자유를 돌려주어야 할 봉사자들의 자유이다.
나는 종종 휠체어를 밀고 가는 봉사자의 걸음과 그들을 교회의 본당으로 맞아들여 함께 예배를 보는 장면을 볼 때면, 그들에 대한 봉사와 배려보다는 그들 몫의 자유를 돌려주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건 어찌보면 모두가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려는 오늘의 세상에서 소리없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자유의 투쟁이다. 그래서 열 사람의 정상인이 한 사람의 장애인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자리는 내게는 그들에 배한 배려의 자리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행진의 자리이다. 자유를 위한 행진은 우리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세상은 불공정하게 시작되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공정이 우리 속에 예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사진을 찍도록 허용해주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 기회에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내가 설악산의 대청봉에 올라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그 사진은 내 몫의 자유로 얻어지나 그들과 함께 하며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누리는 자유가 사실은 그들 몫의 자유란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휠체어를 밀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봉사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들의 봉사야 말로 정말 그들 몫의 자유를 돌려주고자 그들의 발과 머리가 되어 함께 길에 나서는 자유의 행진에 다름아니다. 그 자유의 행진을 찍을 수 있었던 나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일년에 한두 번이긴 하지만
한영교회에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장애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때면 휠체어가 맨앞에 자리한다.
2 thoughts on “그들 몫의 자유”
김동원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인가요?
교회는 작지만 참 좋은일을 하는 교회네요.
저는 교회는 안다니고 있어요.
그렇다고 절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가끔 저를 필요로 할 때 사진찍으러 가는 것 뿐이죠.
그런대로 괜찮은 교회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