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MBC에서 하는 <비밀남녀>라는 월화드라마가 끝났다.
마지막회를 보고 있는데 극중의 서영지라는 주인공이 신춘문예의 동화 부문에 응모하는 장면이 나왔다. 무심결에 그 장면에서 “그럼, 당선되면 결혼할 수 있지. 내가 경험으로 보장할 수 있다”라고 말을 했다.
그 시절에 나는 항상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결혼하자.”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소설을 세 편이나 써서 뿌렸는데 심지어 심사평에서도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그걸로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사실 별로 소설을 쓰고 싶지도 않았던 터라 생각을 접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한번도 소설을 써본 적이 없었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국 학교다닐 때 여기저기 응모할 때마다 상금을 타먹었던 문학 평론을 쓰게 되었다. 첫해는 물먹고 다음 해에 <문학과사회>와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결국 등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서 받은 상금으로 결혼했다.
글은 내게 있어 세상을 뒤집는 전복의 매체였던 것 같다. 주변에서 친구들이 결혼할 때 들어간 돈의 액수를 들어보니 나는 그 돈이면 10번 정도 결혼할 수 있을 듯한 액수였다. 물론 나의 그녀는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할 때 뭘해야 하고, 뭘 주고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나는 결혼이 무슨 거래야? 하고 발끈했으며, 결혼 시계를 맞추러 가선 2만원짜리 시계를 고르고선 나를 시간에 구속시키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때 당선된 덕택이며, 지금 이렇게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살 수 있는 것도 그때 당선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글이 갖는 전복의 힘을 믿고 있다. 그 전복의 힘은 글로 돈을 벌어 가난한 자가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글로는 전혀 생활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때는 현실을 내몰라라 하며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글은 생활이라는 현실적 자장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며, 이상하게 그 자장에서 멀어질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그럼 너무 현실을 도외시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게 바로 글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에 올랐을 때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정상으로 가까이 갈수록 내가 살던 곳에서 멀어지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높이를 가지면서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때부터 내가 살던 곳이, 그곳에서의 내 생활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글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글을 쓰기 위해선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생활의 중압감을 훌훌 털어버리곤 도망치듯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내가 그렇게 살 때, 그 댓가는 나의 그녀가 치룬다. 그녀에게 한편으로 미안하긴 하지만 그게 글의 운명이고,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 때 사실은 그 글이라는 운명의 덫에 함께 걸려든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있는 자리는 항상 가난하고 어둡고 추웠으나 그녀가 사랑으로 내게 왔을 때는 그 자리도 따뜻하고 밝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냥 사는 현실이 내게 너무 가까이 와있다. 내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그냥 마음을 접고 말았다.
2 thoughts on “그럼, 당선되면 결혼할 수 있지”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 때 사실은
그 글이라는 운명의 덫에 함께 걸려든 것이었다.”
캡입니다.^^
근대 반대의 느낌도 없지 않아요.
가끔 내가 결혼과 함께 일상의 늪에 걸려든 것 같은.
그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예요.
어쨌거나 제가 그녀에게서 꿈꾼 것은 자유를 키우는 일상이었죠.
그리스 시대나 중세 시대의 파트롱(patron)이라고나 할까.
지금이 작가가 홀로 황야에 버려진 현대란 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