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명에 대한 시인들의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가령 강화도에 사는 시인 함민복은 뻘밭에선 생명을 보는 반면 도시 문명 속에선 충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의 분출을 본다. 높이를 경쟁하며 점점 더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도시의 거대한 건물들은, 그의 눈에, 발기한 욕망의 상징으로 읽힌다. 반면 <뻘>은 ‘말랑말랑한 힘’으로 온갖 생명을 보장하는 전혀 다른 채색의 공간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선에 대한 수긍보다 반발이 앞선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그 도시에 살고 있다면 그런대로 나의 반발을 거둘 수도 있지만, 이 대도시에는 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 대도시는 어찌보면 욕망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그냥 삶의 공간일 뿐이다. 나는 종종 도시 문명을 부정적으로 채색하면서 자연적 삶에 찬사를 받치는 시들 앞에서 도시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의무감을 느끼곤 한다.
몇번 그가 산다는 강화도에 간 적이 있었다. 강화도에 갈 때마다 뻘밭을 보았다. 소래포구에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도 뻘밭을 보았다. 뻘밭에는 그의 말대로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번듯한 도시에서도 그 뻘밭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때가 많다. 그것은 내가 뻘밭처럼 진득한 재래시장을 지나갈 때나, 아니면 현대적 세련미로 나의 구매 욕구를 유혹하고 있는 호사스런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 점에서 도시는 더 경이롭다. 뻘은 말랑말랑한 힘을 갖고 있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지만, 도시는 거의 딱딱한 콘크리트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생명의 여지를 읽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나는 혹 사람들이 뻘에 가서 도시의 삶을 살아가며 겪었을 각박함을 잠시 잊는 것이 아니라 뻘 속에서 온갖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리하여 도시에서 그들이 생명을 일구며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불현듯 스스로 놀라면서 뻘밭의 생명체에게서 동류의식의 위안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가끔 나는 내 스스로가 경이롭다. 또 나의 그녀가 경이롭다. 주변의 사람들도 경이롭다. 그들 모두가 이 도시에서 서로 얽혀 끈덕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그처럼 때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경이로움이 된다. 뻘밭에 그 생명의 경이가 있고, 또 이 도시에도 그 생명의 경이가 있다.
4 thoughts on “뻘밭에서 – 함민복의 시를 읽다가”
며칠 전 마니산을 다녀온 후에 알았지만 함민복 시인이 근처에 사는 걸 알았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한 번 들려볼 걸 하는 미련이 남았습니다.
동막해수욕장 지나서 좀더 가다 보면 동막 교회인가 나오는데 그 교회 앞쪽의 집에 산다고 하더라구요. 서너 번 들렀는데 그때마다 없더군요.
전 마당에서 화분만지다가 아주 작은 벌레들(거의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같이 작은)이 눈에 띄지도않게 끊임없이 움직이는걸 볼때 저 벌레도 생명이란게 있는거겠지..하는 생각과함께 경이로움을 느낀답니다.
저 사진보니까 만경강 근처의 뻘에 매여있던 낡은 배들이 생각나네요.^^
사진은 강화도에 갔을 때 찍은 거예요.
오늘 속이 상해서 밖에 사진찍으러 나갔다가 술을 퍼먹고 지금 들어왔네요.
일만 없었으면 어디 여수쯤으로 내려갔을 텐데…
그나저나 오늘찍은 사진을 정리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