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의 높이는 1097m이다.
때문에 우리는 월악산을 오르면 1097m의 높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정상까지 갔을 때의 얘기이다.
중요한 것은 그 높이가 한순간에 우리의 발아래 놓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이가 한순간에 우리의 발아래 주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1097m의 높이를 얻는 순간,
우리는 사실 월악산의 높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월악산의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가뿐 숨에 실어서 그 높이를 얻어간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많은 것을 만나게 된다.
순식간에 높이를 얻으면 우리에겐 정상의 높이 이외에 어떤 만남도 주어지지 않는다.
높이가 의미를 갖는 것은,
높이를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만남 때문이다.
그 만남은 월악산에서도 예외가 없다.
산에 가면 우리는 그렇게 높이를 얻으며,
높이를 얻어가는 길엔 수많은 만남이 있다.
내가 산의 높이를 얻기 위하여
아래쪽 언저리에서 발걸음을 떼고 있을 때
물은 계곡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도 계속 길을 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은 가끔 걸음을 멈추고 한자리에 고인다.
잠시간의 휴식이다.
물의 휴식은 맑고 투명했다.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저렇게 물처럼 내려오기 위해서가 아닐까.
흥겹게 졸졸 거리며 산을 내려가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계절따라 바뀌는 계곡의 정취를 즐기는 여유가 물의 걸음에 있다.
나는 올라가는 길의 초입에서 내려가는 길의 내 걸음걸이를 배운다.
덕주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서 이 나무를 만났다.
나무는 흙이 고운 대지가 아니라 바위 위에서,
그것도 아득한 높이로 제 생명을 키워놓고 있었다.
나무가 딛고 선 바위는 공중으로 들려있어 아래쪽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바위는 생명이 뿌리내리기엔 몸이 너무 굳고 그 체온 또한 너무 차갑다.
가끔 이끼들이 바위의 냉기가 안스러워 그 위를 옅게나마 덮어주기도 한다.
그처럼 바위는 보통은 그저 이끼들이 이부자리를 겨우 펴는 자리였으나
나무는 그곳에서 무성한 생명을 가꾸었다.
나무의 삶은 힘들었을 것이나 보는 이는 그 삶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가을 바람의 스산함이 산을 쓸고 가면서
한때 타는 듯 붉었던 단풍도 색이 바래고,
가지도 제 잎과 안녕을 고한다.
그러나 마지막 길은 아쉬운 법.
나무가지가 바람의 등에 실려 대지로 향하던 단풍잎 하나를 불러세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의 얘기가 사각거리며 내 귀를 간지럽혔다.
다 떠나 보내고 혼자 남으면 쓸쓸하다.
여기저기 혼자 남은 나뭇잎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혼자남은 나뭇잎의 가을은 적막하고 고요하다.
한때 바람이 불 때마다
지금의 저 자리에서 왁자지껄한 나뭇잎들의 수다가 귀가 따갑도록 소란스러웠으리라.
멀리 산을 오르는 아줌마들의 깔깔대는 웃음과 수다가 소란스럽다.
하나 남은 나뭇잎의 외로움 때문인지 그 수다의 소란스러움이 좋아보였다.
한 아이가 산길을 걸어 올라온다.
계절은 점점 가을 깊은 곳으로 저물고 있었지만
아이는 푸릇푸릇하다.
그 가벼운 걸음걸이를 보고 있노라니
가을 숲속에서 봄냄새가 났다.
아이는 맨발이었다.
나는 힘겹게 돌계단을 오르는데
아이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 돌과 저 돌로 발을 옮겨놓으며
날듯이 가볍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기가 산이 아니라 개울인가?
나는 흠칫 놀라 주변을 돌아보아야 했다.
물대신 낙엽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아빠도, 또 엄마도 맨발이었다.
아이의 가족은 마애불이 있는 곳까지만 맨발로 산행을 하였다.
마애불 앞에서 엄마가 아이의 사진을 찍어준다.
그들이 맨발로 산행을 할 때
덕분에 나는 산길이 낙옆이 흐르는 물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버섯은 나무에 세를 들었다.
표창처럼 꽂혀있지만
나무는 전혀 아프거나 싫은 눈치가 아니다.
자연의 공존은 어디에서나 보기가 좋다.
월악산의 마애불.
덕주사 쪽에서 1.3km 정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왜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곳으로 내려오지 않고
이렇게 산속 깊이 계신 것일까.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겨 어렵게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면
갑자기 우리는 부처님을 내가 얻어낸 듯 뿌듯한 가슴이 된다.
말하자면 부처가 준 부처님이 아니라
내가 얻어낸 부처님이다.
산 속 깊이 은거하게된 부처님의 깊은 뜻은 바로 그런 부처를 주려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 생각이 맞는 건가요?
그 뜻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부처님은 말이 없었다.
산을 올라가는 내내 발 앞으로 높이가 있다.
높이를 갖게 되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높이를 얻자 내가 있던 자리가 저만치 아래쪽에 있었다.
높이를 얻으면 그렇게 금방 내가 있던 자리가 풍경이 된다.
마애불의 앞쪽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은행나무와 높이가 엇비슷했을 때는
숲의 나무가지 사이로 노란빛이 저만치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높이를 가지자
은행나무는 제 몸을 온전히 모두 드러낼 수 있었다.
아직 숲의 나뭇가지들이 내 앞에서 하늘로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있었지만
내 시선은 그 나뭇가지의 우듬지를 훌쩍 타넘어
은행나무의 노란빛을 마음껏 빨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완연한 높이를 가지자
저만치 아래쪽의 은행나무도 제 모습을 완연히 드러냈다.
좀전에 내가 있던 자리이다.
그곳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높이를 가지니 내가 있던 자리가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높이를 얻으러 가는 길은
알고 보면 나를 보러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정상을 눈앞에 두었을 때
나를 반겨준 것은 까마귀였다.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까맣게 울었다.
어렸을 때 까마귀만 보면 재수없다며 돌팔매질로 훠이훠이 쫓아버렸는데
내게 해꼬지 한번 없었던 까마귀는 무척이나 억울했을 것이다.
오늘은 까마귀의 그 까만 울음소리를 정상이 “가까우니 힘내라”는 언질로 받아들였다.
어릴 적의 그 미안한 돌팔매질은 씨익 한번 웃어준 웃음으로 떼웠다.
항상 높은 곳에 오르면
말라죽은 고사목을 만나게 된다.
나무야, 나무야, 어쩌다 네 운명의 마지막은 그렇게 되었니?
나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의 평생을 대지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고
물을 길어올려 살아가고 있었지.
땅만 내려다보고 살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어.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한가득이었고,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지.
그날부터 나는 하늘을 마시며 살고 싶었어.
그렇게 하늘을 호흡했더니
몸이 점점 말라 결국은 오늘의 나에게 이르렀지.
내 인생의 절반은 물을 길어올려 가꾸었던 초록빛 생명이었고,
나머지 인생의 절반은 하늘을 맘껏 호흡하며
하늘의 푸른빛과 흰구름, 혹은 붉은 노을을 대지로 실어나른 것이었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내 삶의 마지막은 찬란하기 이를데 없었어.”
제일 꼴찌로 산을 내려왔다.
호젓한 산길을 터덜터덜 홀로 걸었다.
길을 따라 물처럼 낙엽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내려가다 잠시 그 길에서
물처럼 엉덩이를 깔고 앉아 다리의 피곤을 달래며 쉬곤 했다.
내려가는 산길은 그냥 길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의 배웅이기도 했다.
배웅은 매우 극진하여
산길의 동행은
내가 산의 아래자락을 벗어날 때까지
내내 계속 되었다.
2 thoughts on “산에 가서 높이와 만남을 얻다 – 충북 월악산에서”
11월의 단풍은 어쩐지 쓸쓸하네요.
10월 단풍의 축제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괜히 날이 쌀쌀해지니까 마음도 우울해지네요.^^
큰일 났네. 이제부터는 계속 겨울 분위기의 사진이 올라갈 텐데. 눈이 올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특집으로 남해안의 가을 바다를 선물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바다는 그다지 쓸쓸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금요일밤쯤 떠나서 한 2박3일 동안 돌아다니다 올까 생각 중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