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의 편지 한 통 – 한경원 목사의 소장품

우연한 기회에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함석헌 선생의 편지 한 통을 접하게 되었다. 함석헌이란 이름 석자가 한국의 사상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름이라 그 편지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족했다. 더구나 편지 속엔 시 한편이 동봉되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편지의 소장자인
한경원 목사

편지의 소장자는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 한경원 목사(81세)이며, 그는 현재 부천 화평교회의 원로목사로 있다. 그가 함석헌 선생을 만난 것은 1959년 11월이었다. 당시 그는 강원도 미탄 지서의 주임으로 있었으며, 미탄면의 치안책임자였다. 한경원 목사는 함석헌 선생을 만난 11월을 아직 눈은 오지 않았지만 날씨는 좀 추울 때였다고 말한다.
당시 그곳에는 함석헌의 제자 홍순명이 있었고, 함석헌의 미탄행은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홍순명은 함석헌을 종교가 같았던 한경원에게 소개했고, 한경원은 그에게 미탄 지역을 구경시켜 드렸다고 한다.
한경원 목사는 함석헌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길을 가다가 송아지를 만났어요. 시골이니까 길가에 송아지가 있곤 하잖아요. 그러면 함석헌 선생은 송아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면서 ‘아,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죠. 여기처럼 공기좋고 물좋은 곳에 숨어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렇지만 어디에 숨어도 또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함석헌이 미탄에 묵은 것은 이틀이었다. 그때 한경원이 안내한 곳은 청옥산에 있는 육백마지기란 고지대의 평원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편지의 겉면

받는 사람의 주소는 강원도 평창군 미탄지서 한주임 귀하라고 되어 있으며, 보내는 사람은 충남 천안읍 씨알농장 함석헌으로 되어 있다. 우편봉합엽서라고 찍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편지의 내용

편지의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몇 곳은 현재의 표현으로 고쳤으며, 한문을 알 수 없는 부분은 물음표(?)로 처리했다.

저번에 갔을 때 저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주시고 정성으로 대하여 주어서 잊을 수 없이 감사합니다. 그후 안녕하시며 관할 내 다 무고합니까? 육백마지기가 아직 눈에 선합니다.
홍순명군은 제가 알기론 좋은 청년이오니 많이 돌보아 주셔서 하나님과 나라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육백마지기는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도에도 알아보겠습니다. 될 수 있다면 소규모로 나마 시작을 할까 합니다. 응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을 시작한다면 가급적 한주임이 거기 계신 동안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부락에는 기독교 신자는 한 명도 없습니까? 다른 무슨 교도는 혹 없는지요. 거기 혹 공공사업에 정신이 좀 있는 인물이 있습니까? 홍군에게 그런 ???참고될 것을 일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일이면 성탄입니다. 뜻깊이 맞으시기 바랍니다.

24일

편지와 함께 시 한 편이 동봉되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시, 앞쪽
Photo by Kim Dong Won
시, 뒤쪽

동봉된 시는 <빚을 졌거든>이란 제목을 달고 있으며,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문맥을 봐서 일부를 고쳤다.

-빚을 지고 해를 넘는다.
「이제」란 시간(時間)의 의미(意味)는 이때까지의 실패(失敗)를 단번에
회복한다는 데 있다.
삶은 책망(責望)이다. 왜 이 꼴이나 하는 책망
빚을 지면 종이다, 자유(自由)없다.
어떻게 하면 나일 수 있을까? 근본(根本)을 생각해보자.

-인생(人生)은 빚
흙을 빚어 사람되다.
사람은 여러가지 요소(要素)를 빚어 만든 것, 집대성(集大成).
인생(人生)의 모든 것이 제 자작(自作)이 아니고 빌려온 것이다.

-인생(人生)은 빚이므로 자유(自由)하잔 것이 그 본질(本質)
빚을 벗자.
고(故)로 가진 모든 것을 부정(否定)해야(이것도 저것도 다 나는 아니다.)
천성(天性)을 회복해야. (형(形)을 버려서 성(性)을 회복)

-빚을 졌거든 물어라
적은 빚은 물 수 있지만 큰 빚은 못문다.
물 수 없거든 빌어라.
빎(祈)은 빎(借)이다.
사람에게 빌면 빚에 빚을 더할 뿐
하나님께 빌어야(하나님은 채주(債主)는 아니다)
적은 빚 벗기 위(爲)해 큰 빚을 져라.
(물질(物質)의 빚을 물기 위(爲)해 정신을 빌어라)

-빌어도 아니되거든 의지로 헤쳐라.
집을 이루면 또 빚 받으러 온다.
파산선고(破産宣告)를 하면 자유(自由)다.
인생(人生)의 자유(自由)는 집살림 때문.

-의지로 헤처도 달라거든 도망을 해라.
그믐날은 도망하는 날.
도망은 타국(他國)으로 해야한다.
이 세상을 놓지 못하면 빚 달라는 것에서 불면(不免).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부자(富者)가 못따라 온다
바늘귀로 빠져 나가라(내 몸까지도 버려야)

-도망하다 잡히거든 지옥으로 가라.
빚을 졌거든 져라(負)
스스로 지면(自負) 자부심(自負心)이 생긴다.
자부심(自負心)가지면 패(敗)한다. 배반(背叛)한다.
한없이 지는 데가 지옥이다.

-지옥에 가거든 그 밑바닥을 뚫어라
스스로 극악죄수(極惡罪囚)로 처(處)하라.
지옥 바닥이 뚫리면 천국(天國)된다.

-지옥 바닥을 뚫거든 전죄수(全罪囚)를 거느리고 탈옥(脫獄)해라.
그러면 구세주(救世主)가 된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괴수.
그러면 문밖에서 이를 갈고 우는 것은 빚 못받은
의인(義人)들 뿐이라.

나이를 살펴보니 당시 함석헌의 나이는 58세였으며, 한경원은 35세였다. 함석헌을 만나기 전부터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한경원은 결국은 경찰을 그만두고 농민운동에 투신했으며, 나중에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를 다닌 뒤 목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단 이틀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함석헌과의 인연은 그가 보내준 편지와 함께 한경원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6 thoughts on “함석헌 선생의 편지 한 통 – 한경원 목사의 소장품

  1. 대학교 1학년 때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받었던 생각이…
    감히 깊이 애정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시를 읽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
    이 댓글이 거의 6년 만에 덧붙여지는 댓글이군요ㅎ

    1. 오래 전 어느 단체의 부탁을 받고 책을 하나 만들면서 여러 분들 취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접하게 되었어요. 옛날 사진들 보다가 보니 귀한 소장품들이 나오더라구요. 정우씨 덕에 저도 함석헌 선생님하고 한경원 목사님을 6년만에 다시 뵙는 느낌이예요. 그때 취재한 분들 중에 세상 뜬 분도 있고.. 짧은 세월이 아니네요.

  2. 김동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기탄 위인전을 진행하고 있는 출판 기획사 비단구두 백모란입니다.
    이번에 함석헌 선생님 위인전을 진행하는데,
    선생님께서 찍으신 편지 이미지를 책에 싣고 싶어서 메모남깁니다.

    사진 출처는 면지에서 밝히고 있고요,
    큰 돈은 아니지만 원하시면 사례도 하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어린이책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 시의 맨 끝 문장이 독특하네요.
    저 부분은 성경에도 있잖아요 마태복음 25장30절.
    근데 빚 못받은 의인들이 이를 갊이 있다는건 뜻밖의 해석이네요. 반어법인가요.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던말이 떠오르네요.
    “그대는 그런사람 가졌는가”란 시가 제일 많이 알려져있죠?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가졌다면 그게 바로 재산일텐데.^^

    1. 시가 아주 독특한 것 같아요. 지옥을 천국으로 반전시킬 길을 내놓고 있으니 말예요. 바늘귀로 도망가면 부자들이 쫓아오지 못한다는 대목에서는 많이 웃었어요. 생각의 자유가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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