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행이 치미는 분노와 울적함에서 시작된 경우가 있었다.
그 분노와 울적함으로 인하여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나는 어느 날은 밤열차에 몸을 싣고 여수로 갔었고,
또 어느 날은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면도의 방포해수욕장도 그렇고,
그녀와 함께 한밤중에 진고개를 넘어 찾아간 속초 바다도
그곳으로 떠난 발길은 그렇게 분노와 울적함에서 시작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때마다 경험했던 자연의 치유력이다.
방포해수욕장의 바닷가엔 모래가 아니라 자갈이 구르고 있었던 기억이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그 곳의 바닷가엔 자갈과 자갈이 몸을 부딪는 소리가 함께 굴러다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그 시간을 따라 나를 따라왔던 분노와 울적함도 함께 흘러가 버렸다.
그믐의 어둠 속에 묻혀 그저 소리로만 제 존재를 밀고 왔다 밀고 가던
속초 바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속초의 밤바다는 시꺼먼 어둠 속에서 푸른 파도 소리로 내 가슴에 밀려들더니
그곳에 단단히 박혀 있던 분노과 울적함의 응어리를 순식간에 쓸어가 버렸다.
그렇게 나는 멀리 걸음할 때마다 어김이 없는 자연의 치유력 앞에서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는 지하철을 타고 가서 하늘공원에 있었고,
어제는 버스를 타고 하남시의 검단산까지 갔다가
팔당대교 아래쪽에서부터 미사리까지 한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하늘공원에도 자연이 있었고,
미사리의 한강변에도 자연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공원에선 그다지 위로받지 못했는데
미사리의 한강변에 앉아있노라니
분노로 자리를 찾지 못하던 마음이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둘의 치유력은 왜 이렇게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도심의 공원은 일종의 진통제이다.
하늘공원이 그렇고, 올림픽공원과 복원된 청계천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울적할 때 그곳에 가며
그러면 잠시 도시를 살면서 얻은 마음의 통증이 무마된다.
하지만 그것은 통증에 대한 잠시간의 무마일 뿐, 치유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 진통제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이 도시를 사는 우리들이 마음의 통증을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그러나 한강으로 나온 나는
그저 서울의 경계를 벗어나 팔당대교의 아래쪽 한강변에 앉았을 뿐인데
그곳에서 아무 생각없이 철새들의 노닥거림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통증을 다독이고 상처를 치유해 내는 자연의 치유력에 놀란다.
그녀가 전해준, 강원도 지역에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는 소식에
나는 내일은 강원도로 멀리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 thoughts on “자연의 치유력”
오후에 잠깐 티비보는데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에서 믿었던 사람에게 전재산을 빼앗긴뒤 분노로 자신의 이마를 피가 철철 흐를정도로 벽에 부딪히며 괴로와했던 할아버지가 떠오르네요. 그 할아버진 나중에 운동으로 분노를 용서로 바꾸셨던데.^^ 김동원님은 멋진 풍경을 찾고 그곳에서 위안을 얻으시네요.
전 기분전환으로 만화책을 빌려다보거나 새로운 케익을 만들어보거나 향기로운 백합을 한송이 사거나 프리지아를 사거나해요.^^
가을소리님의 케익은 블로그에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