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아는 사람들 여덟 명으로 일행을 꾸린 뒤,
2월 4일 토요일에 태백산에 다녀왔다.
내 고향 영월을 거치고,
영월에서 옥동, 녹전, 상동을 지나 유일사 입구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산을 올랐다.
원래 서울에서 원주, 제천을 지나 영월까지 가는 길과
영월에서 상동을 지나 태백으로 가는 길은
둘 모두 똑같은 길이었다.
예전엔 그 두 길이 모두 가는 내내 쉼없이 구불거렸다.
결혼을 하고 처음 그녀와 함께 고향에 내려갈 때,
우리는 고개를 네 개나 넘어야 했으며,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것을 이제 고향이 점점 가까이 다가 온다는 설레임으로 삼았다.
그렇게 강원도의 길은 어디나 편하게 발을 뻗질 못했다.
강원도의 길은 항상 양의 창자처럼 이리저리 구불거렸고,
그래서 그 길을 갈 때,
나는 강원도의 뱃속을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때문인지 그 길에서 아늑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새길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내가 지금까지 다녔던 강원도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 길은 아주 편하고 시원스레 다리를 쭉 뻗고는
우리들이 그 길을 마음대로 내 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제는 영월까진 한번도 고개를 넘지 않는다.
중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하여,
호법에서 영동으로 바꿔타고,
남원주에서 다시 중앙고속도로로 길을 바꾼 뒤,
제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고속도로로만 한걸음에 달려가며,
제천에서도 4차선의 시원스런 새도로를 타고
눈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이면 벌써 영월에 도착한다.
그 길은 정말이지 편하고 빠르다.
나는 그 길을 갈 때마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급한 마음을 채워주는 빠른 속도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앓았다.
그러나 영월을 지나 옥동, 녹전, 상동을 거치며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까지는 옛모습 그대로이다.
영월에서부터 나는 구불구불 거리며,
옛날과 똑같이 그 길을 따라가야 했다.
차는 고개를 숨가쁘게 오르내리고,
강의 굴곡을 거역하지 않은채,
이리저리 휘어지며 태백으로 간다.
가는 내내 강원도의 풍경이 낮아졌다 높아지며 차창으로 함께 한다.
운전하는 그녀는 힘들었겠지만
차창의 풍경을 시선에 주워담기 바쁜 나는
내가 빠르고 편안하게 영월까지 오는 동안 잃어버렸던 그 무엇인가를
그 길에서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유일사 입구에서 태백산으로 오르는 첫발을 뗄 때,
나의 마음은 이미 그 뿌듯한 충족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일사 입구에서 우리는 다소 놀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광버스 행렬과
주차장을 가득 메운 그 많은 차들 때문이었다.
차를 세웠다기 보다 간신히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유일사 입구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중간까지는 아주 길이 넓고 좋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진다.
태백산의 유일사 입구 등산로는
현대적인 영월까지의 새도로와
영월에서 태백까지의 옛도로를 그대로 닮았다.
그 길의 초입에 오늘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차림새가 모두 등산복이란 것을 제외하고 나면
혹시 태백산 꼭대기에 출근길의 지하철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인파 속에 묻혀
밀려가듯 오르는 산행은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이렇게 산을 오르면,
제 체력으로 산을 오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많은 인파 속에 묻혀 얼떨결에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뒷사람이 떼는 한 발이 앞사람의 등을 밀어주고
앞사람이 떼는 한 발은 뒷사람의 발길을 끌어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번잡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산을 오르는 장면은 한편으로 흐뭇했고,
우리 일행도 그 속에 묻혀 즐겁게 산을 올랐다.
또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다 받아주는
태백산의 넉넉함도 고맙기 그지 없었다.
정상에 오른 기쁨이
산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마치 풍경을 안고 구비구비 돌아가는 강원도의 옛길처럼
뽀드득 거리며 발밑에 밟히는 눈소리를 들으며
호젓하게 천천히 오르는 산길의 즐거움도 매우 크다.
태백산 겨울 산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상고대라 불리는 눈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턱에서 눈꽃에 시선을 뺏기고 있으려니까
내려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올라가면 더더욱 기가막히다고 말해주었다.
태백산의 또다른 명물 중 하나는
등산길의 여기저기서 만나는 주목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은
그 무구한 세월로 제 몸을 키워 태백산의 풍경을 엮는다.
꽃은 원래 저 깊은 땅속에서 색깔을 길어올려 피는 것이련만
눈꽃은 물길마저 숨을 죽인 한겨울에
허공을 날던 물알갱이를 가지 끝에 모아 피어난다.
겨울의 태백산 꼭대기 칼바람 속엔
하얀 꽃가루가 날라다니고 있는 셈이다.
태백산의 정상 장군봉 가는 길.
겨울엔 붉은 주단이 아니라
희디흰 눈비단을 깔아서 사람들을 맞는다.
태백산 정상의 눈꽃.
정상은 오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눈꽃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태백산 정상.
태백산은 오르기가 쉬워서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높이를 얻었을 때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시선을 거리낌없이 멀리까지 날려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선이 멀리 날면
그 순간 가슴이 시원해진다.
높은 곳에서 우리의 시선이 그냥 멀리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날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눈꽃은 바람이 찰수록 더욱 하얗게 영근다.
태백산 정상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눈꽃의 한가운데서 그 아름다움에 취하면
누구나 잠시 겨울 추위를 잊고 만다.
바람은 이쪽으로.
나무가 가지를 뻗어 바람의 길안내를 했지만
바람은 제멋대로여서
종종 아무 곳으로나 대중없이 몰려다녔다.
나뭇가지는 봄과 여름에는 푸른 잎의 자리이고,
가을엔 단풍의 자리이다.
겨울엔 거의 대부분 그 자리를 휑한 하늘로 채워두지만
때를 잘 맞추면
잠시 그 빈자리를 찾아온 눈꽃을 볼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 늦은 오후의 햇볕이
나무 가지 사이로 언듯언듯 제 얼굴을 내밀며
계속 나를 따라왔다.
태양과 안녕을 고한 뒤에는
고향 친구 기탁이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사람들과 함께 태백에 내려왔는데
저녁으로 같이 하기에 좋은게 뭐 없냐고 물었다.
기탁이는 영월 읍내로 들어가서
청산회관의 곤드레밥을 대접하라고 권해주고는 예약까지 해주었다.
저녁값은 같이간 서울의 진표네가 냈다.
모두가 맛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즐거워하니
고향으로 안내한 나도 행복했다.
12 thoughts on “태백산 눈꽃 산행”
눈꽃이 멋집니다.
이런 눈꽃을 보고자 갔었는데 서리만 보다가 왔습니다.
이러면서 알게 되는게 눈꽃 사진 찍으려면 눈오면 바로 달려가야한다 정도 인 듯 합니다.
풍경 사진은 완전히 재수더라구요.
저도 이번에 눈사진을 찍겠다고 화천으로 갔는데
그날 눈은 남쪽에서 펑펑 쏟아졌어요.
하지만 눈이 없는 화천의 겨울 풍경도 아주 좋더군요.
물이 가장 아름답게 자신을 꾸며 보일 때가 눈꽃인 것 같습니다. ‘크게 희다’라고 이름붙인 까닭을 님의 사진들을 보구 새삼 깨닫게 됩니다. 즐행하시기를……
태백산의 글자를 푸니 또 그렇게 되는 군요. 태백의 의미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태백에 대한 또다른 실마리를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먼저 그놈의 잠때문에 찾아주는 친구가 지척에 있음에도 얼굴을 못 보았으니 할말이 없구나–미안하구먼 –핑계를 대자면 아침부터 울진에서 이리저리 꾸불꾸불 강원도 산길을 돌아다니다 집에 오니 반기는 것은 우리집 멍멍이 해피고 떨어지는 것은 눈꺼풀이야-잠을 이기지 못했네–그래도 고향에 간만에 왔으니 따뜻한 차라도 대접할려고 했건만–
–하옇튼 맛있는 저녁이 되었다니 다행이고 —참말로 오랜만에 태백산 설경 잘보았네-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것이 태백산이라 생각되네–변하는 것은 사람들이지 뭐–그래 글도 잘 읽었어___ 가내 두루 행복하시고^^^^^-2월중순께 서울서 보자구
이번 모임 서울에서 하는가 보네. 저번에 한번 서울에서 모이더니 서울에 맛들인거 아냐. 우리야 편하지만. 어쨌거나 그럼 서울에서 곧 얼굴 보기로 하자.
아..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네요.
저렇게나 많은 분들이 그 높은 산을 오르시다니..
겨울산행은 한번도 안해본 저로서는 놀랄뿐입니다.^^
멋진 사진들 가슴이 시원해지네요.^^
줄을 서서 산에 올라갔으니까요.
처음엔 한 세 사람 정도가 함께 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지만 중간부터는 한 사람밖에 못갈 정도로 폭이 좁아져요.
거기선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해 한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했어요.
산에 가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본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었어요.
태백산에 올해 처음으로 눈이 온거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모두 벼르고 태백산으로 몰려든 것 같다는 느낌이었죠.
다행히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달라서
내려올 때는 여유로웠어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모습이 서로 의지되고 힘이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부끄러워 지네요. 😉
같이 갔던 분들이 했던 얘기들이예요.
올라갈 때는 그냥 줄서서 걷다보니 정상이었는데
올라간 사람들이 모두 당골이라는 곳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내려올 때는 호젓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내려오는 길이 굉장이 멀게 느껴졌는가 봐요.
이렇게 높은 데를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며
함께 갔던 그 많은 사람들 덕분이라고 모두 입을 모으더군요.
그냥 묻어서 얼떨결에 정상까지 갈 수 있었다구요.
저는 그 얘기를 그냥 귀담아 들은 뒤에 줏어가지고 와서 냉큼 써먹어 버린 거죠.
그냥 주변의 분들에게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 분들 하고 같이 다니며 유심히 관찰하는 것으로 많은 것을 건지곤 하죠.
참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함께 동행한 일행에 저도 끼어있는 듯 저도 행복해 집니다. 하얀 순백의 눈길이 멋지네요
이젠 당분간 이런 눈길도 보기 어려울테지요
남은 휴일 즐거우시길…^^
내일부터 수요일까지 서울에도 눈이 온다고 해요.
서울에 눈이 오면 가까운 남한산성과 미사리 한강변으로 곧장 달려갈 생각이예요.
눈오면 좋은 사진 선물해 드릴께요.
건강하시길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