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날, 잠깐 고향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영월과 서울을 오가는 길은 언제나 기차였다.
우리는 동차라고 불렀던 새벽 여섯 시 기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 청량리역에서 내렸다.
그러다 기차의 시대를 마감하고 버스의 시대로 넘어갔다.
그때는 원주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그곳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올라왔다.
영동고속도로밖에 없던 시절이다.
그러다 영월에서 시작하여 서울로 올라오던 길이
서울에서 시작하여 영월에 다니러 가는 길로 바뀌었다.
한동안 여전히 영동고속도로가 전부였던 그 길은
고속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중부를 타고 가다 호법에서 영동으로 바꾸어타고,
그리고 다시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바꿔타는 것으로 변했다.
우리는 신림에서 빠져나가 주천을 거쳐 영월로 갔다.
제천과 영월 사이의 국도가 차로 붐벼 종종 막혔기 때문이었다.
내 차를 갖고 다니게 된 시절이었다.
그러다 요즘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까지 가고,
제천에선 새로난 길로 영월까지 간다.
내려갈 때는 인천사는 영준이가 우리 동네에 들러 나를 태워갖고 내려갔고,
올라올 때는 김포사는 윤식이가 나를 동네 가까이 떨어뜨려주고 갔다.
난 운전을 못하는데 내려가고 올라올 때 고향 친구들 덕을 톡톡히 본다.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바꿔타고 조금가자
구름이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날 인천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은 비가 한줄기 지나간 뒤였다.
강원도도 그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비가 지나간 뒤엔 항상 구름이 좋다.
제천의 외곽도로.
길의 끝에 영월로 나가는 길이 있다.
영준이는 이 길의 중간에서 충주로 나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의 풍광이 아주 좋다고 알려주었다.
청풍호로 연결되는 길이다.
언제 고향으로 내려가다 그 길로 슬쩍 새봐야 겠다.
우린 연당에서 영월까지 이어지는 새로난 길을 버리고 옛길로 나갔다.
그리고 영월 삼거리의 강변에 이르렀다.
이 강은 서강 줄기이다.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던 강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조그만 다리가 나룻배를 대신하고 있었다.
강물은 예전처럼 맑았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깊고 넓어보였던 강이
이제는 내려갈 때마다 좁고 또 작아보인다.
영월 읍내로 가지 않고
고향인 문곡으로 들어갔다.
학교 앞의 밭에서 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영준이는 수수는 고개를 숙인 것도 있다고 했다.
서울 사람들은 고개만 숙이면 다 조로 안다며 웃었다.
앞에 보이는 산의 아래쪽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보이지 않아도 그 너머가 훤히 보이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수수밭을 따라 개울로 내려가 보았다.
원래 개울 건너편에서 이편을 잇는 둥근 철제 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없었다.
논을 따라 쌓아올린 굳건한 콘트리트 옹벽도
원래는 돌로 쌓여져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오랜 옛기억이 되어 버렸다.
영준이네 집.
사람은 살지 않는다.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었으나 그것도 보이질 않는다.
영준이는 집의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소를 키우던 외양간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기억이 아련했다.
내려갈 때 나를 태워준 친구 영준이.
우리가 다닌 학교의 정문이다.
위치는 그대로지만 우리가 다닐 때의 그 문은 아니다.
우리가 다닐 때도 문은 있었지만 그건 닫을 수가 없는 문이었다.
그냥 드나드는 곳의 위치가 그곳이었을 뿐,
사람들의 걸음을 막는 철문같은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뒤쪽으로도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곳은 풀이 뒤덮어 길이 거의 없어지고
대신 번화한 삼거리쪽으로 또 하나의 문이 나 있었다.
내가 졸업한 문곡학교.
지금은 분교가 되어 버렸다.
마차 초등학교의 문곡 분교이다.
교문에 붙어있는 마차 초등학교라는 학교 이름을 보니 조금 서글펐다.
우리가 다닐 때는 1층 건물이 운동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뒤로 건물을 2층으로 올리면서 나머지 건물들은 없어져 버렸다.
한번의 삶을 사는 동안 너무 변화가 많다.
서울의 변화만큼 크진 않지만 시골도 많은 것이 없어지고 있다.
그나마 산과 들의 변화가 적은 것이 다행이다.
뒷동산으로 구름이 저녁빛을 받으며
꼬리를 길게 끌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 내가 클 때 함께 했던 구름처럼 느껴졌다.
고향에서 바라보면 구름에도 옛기억이 스며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자랄 때,
나와 크거니 작거니 키를 다투었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서 물가에 우뚝 서 있었다.
멀리 물가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을 우리는 뱀산이라 불렀다.
뱀처럼 길게 꼬리를 끌고 있는 산이다.
유난히 저 산엔 뱀이 많기도 했었다.
고향은 어디나 남다르다.
20여년을 그곳에서 자라,
어디를 보아도 기억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하루 그곳에서 옛기억을 속속들이 더듬다 오고 싶다.
8 thoughts on “잠깐 고향에 다녀오며”
김동원님 고향은 아직 그대로인가봐요.
전 태어나긴 전주에서 태었났지만 어린시절 대부분을 보낸
경기 마석이 제 고향이라 생각하는데 너무 많이 변해서 아쉬워요.
고향의 자연은 점점 더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 같아요.
내 키를 밑돌던 나무들이 전부 내 키를 훌쩍 넘어섰으니까요.
뒷동산에 좀 올라가 보려고 해도 길을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한번 가겠노라 벼르시더니 다녀오신
고향소식 잘 읽었어요. : )
비 온 뒤 뭉게구름이 참 이뻐요.
벼르고 간건 아니고 친구 아버님 돌아가셔서 급하게 내려갔다 왔어요.
잠깐 돌아봤는데도 좋더라구요.
넓었던 학교 운동장이 지금 가보면 너무 작아 보입니다.
사람이 커 버린 것인지 욕심만 팅팅 불은 것인지……
저 운동장에 풀들이 주인되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아요.
강원도 내려갈 때마다 그런 학교들 많이 봤는데
내가 나온 학교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죠.
시골은 읍정도가 아니면 거의 학교가 남아나질 못하는 거 같아요.
이젠 내 고향 같으우.
저 뱀산도, 영준씨네 집도, 초등학교도… 저 하늘에 구름까지 다 눈에 익으니…
하긴 나도 이제 영월 내려가는 길을 훤히 알 정도이니 내 고향이나 다름없네.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자란 사람들은 밑둥이 숭덩 잘린 기분이야.ㅜ.ㅜ
그대 고향 진주보다 더 많이 내려갔잖아.
그러니 그럴 만두 하지.
20년은 살아야 좀 기억이 남는 거 같아.
이번에는 내려가면 저 개울따라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