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바다를 추억하며 – 충남 태안의 안흥에서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시인은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미닫이문을 여닫을 때 나는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해변의 모래를 밀고 올라오는 파도 소리로 들리고
바람이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커튼을 흔들고 지나갈 때면
그 커튼의 일렁임도
바다의 손짓으로 보인다고 했었다.
그 정도의 중증으로 바다를 앓은 적은 없지만
2004년 5월 24일, 나는 충남 태안의 안흥 바다에 갔었다.
그날 내가 집을 나선 것은 아침 5시 30분이었으며,
집에 돌아왔을 때의 시간은 저녁 7시 30분이었다.
그때의 기록을 들추어보니
그날 바다를 보기 위해 내가 들인 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지하철 700원x2번, 모두 1400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태안까지 가는 버스비: 9100원x2번, 모두 1만8200원.
안흥항 유람선: 1만2천원.
아침: 우동 2천원.
점심: 조개탕 6천원.
태안에서 바다까지 오가며 탄 시내버스 1400원x2번, 모두 2800원.
모두 더하니 4만2400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 나는 바다를 떠돌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다에 있는 동안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때의 사진을 다시 들추며,
잠시 5월의 안흥 바다에 젖어들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안흥항의 유람선 타는 곳.
할머니 한 분과 개 한 마리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Photo by Kim Dong Won

때로 차를 몰고 가다
한적한 곳의 길 한켠으로 차를 세우고
그 안에 누워있다 보면
마치 차 속이 따뜻하고 포근한 작은 집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배는 어떨까?
그냥 바다에 둥둥 띄워놓고
그 안에 누워있으면
배는 작은 섬처럼 느껴질까?

Photo by Kim Dong Won

가의도.
원래 내가 가고자 했던 섬.
그러나 도착해서 보니
가의도로 가는 배는 하루에 두 번,
아침 8시 30분하고 저녁 6시밖에 없었다.
결국 유람선을 타고 먼발치에서 섬을 바라보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섬은 신비로웠고
들르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섬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는 더욱 그 채색이 짙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물개섬.
믿기지 않겠지만 물개들이 많이 살아
물개섬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물개가 다 있었나 했다.
지금도 물개가 살고 있다면 훨씬 더 좋을텐데.
그럼 물개들이 두 섬을 오가며
이 섬의 얘기를 저 섬에,
저 섬의 얘기를 이 섬에 전해줄텐데.
얼굴만 바라보고 사는 세월 속에선
두 섬의 사이로 무료함이 흐르지만
그렇게 물개들이 두 섬의 얘기를 퍼나르면
두 섬의 사이에 훨씬 더 잔재미가 커질텐데.

Photo by Kim Dong Won

섬은 종종 우리에게 한 폭의 그림으로 와닿지만
그 그림을 깎아낸 것이 세월의 풍파란 것을 생각하면
그 그림 앞에서
섬이 견뎌온 세월의 힘겨움에 더 먼저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사는 것의 힘겨움은 참 무서운 것이다.
그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가로막기도 하니…

Photo by Kim Dong Won

가의도의 바위.
바위는 파도와 바람을 사랑했다.
원래 바위의 가슴은 꽉막혀 있었지만
바람과 파도의 사랑이 밀고 들어갔을 때
그 가슴이 뻥 뚫렸다.

Photo by Kim Dong Won

때로 거리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두 섬 사이에 제법 거리가 가로놓여 있을 때는
평생을 얼굴만 마주한채 살아가는 멀뚱한 삶이 둘의 운명 같더니만
볼을 스칠만한 간격으로 두 바위의 사이가 좁혀지자
그 사이에서 자꾸 소근소근 얘기가 솟는 듯했다.
그래, 사랑할 때는 그렇다.
몸과 몸 사이의 거리를 몰아내고
둘이 한 자리에 앉고 싶어지며,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
둘의 사이가 너무 비좁아
소근거림밖에는 그 사이에 둘 수가 없다.

Photo by Kim Dong Won

사자 바위.
사자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전설이 있지만
나는 전설은 그냥 귓전을 지나는 바람에 흘려버렸다.
다음에 다시 이 사자 바위를 지나칠 때면
그때는 낄낄거리며 웃어볼 작정이다.
고고한 품위로 바다에 떠있기 위하여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을
바닷물 속의 사자 다리 네 개를 생각하며.

Photo by Kim Dong Won

가끔 내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나라를 온 듯할 때가 있다.
이 정도면 잠시 카리브해의 환상에 빠져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갈매기가 항상 날개짓으로 분주한 것은 아니다.
마치 페달에서 발을 놓고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자전거처럼
갈매기도 날개짓을 놓은 채
그냥 바람을 타고 허공을 활강하거나
아니면 하늘에 섬처럼 둥둥 떠 있을 때가 있다.
갈매기도 그때가 가장 신날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자전거를 탔을 때
가장 좋은 점은
김훈이 말한대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적당한 속도감일 것이다.
그 속도감은 항상 바람에 묻어서 온다.
내가 자전거를 탈 때
그렇게 바람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속도감인데
갈매기가 하늘을 날 때
바람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건 자전거를 탈 때와는 다를 것 같다.
나는 누리지 못하고
갈매기만 누릴 수 있는 그 부럽기 그지 없는 느낌은
바람의 부력이 아닐까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가위, 바위, 보.
나는 오직 보밖에 모른다네.

Photo by Kim Dong Won

떠나가는 배.
그리고 남아있는 배들의 노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Photo by Kim Dong Won

물이 갈라지면
그 사이로 길이 난다.
물의 사이로 길이나면
그때부터 물의 한가운데서
물과 함께 걸을 수 있다.
사람들은 물이 갈라지면
그 사이의 길에서
건너가는 즐거움에 왁자지껄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물의 한가운데서
물과 함께 걷는다는게 더 신나는 즐거움이다.
물의 옆에서 걷는다는 것과
물의 한가운데서 걷는다는 것은 그 느낌이 다르다.
물의 한가운데서 걸을 때는
마치 모태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4 thoughts on “5월의 바다를 추억하며 – 충남 태안의 안흥에서

  1. 그때 사진에 취미가 있었다면 사진기를 챙겨 갔을 텐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의도 주변 바다가 정말 깨끗하지요?
    거짓말 조금 보태 물고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더랍니다.
    이제는 정말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안타깝습니다.

    1. 원상태로 가려면 10년 정도는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
      사람들 삶을 10년이나 뿌리뽑아 놓고 배째라하는 삼성 보면 할 말이 없어요.

  2. 요즘같이 날씨 좋은 날에는 갑자기 불현듯 귓방망이를 때리듯이 여행가고 싶다는 생각이 날때가 있잖아요.
    그럴때 바로 떠나는게 나는 왜 이리 쉽지 않은지…
    오늘 날씨는 추웠지만 이넘의 봄이 몸을 들썩거리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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