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없었다면 이런 만남을 꿈꿀 수 있었을까.
인터넷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라면
그건 풍요로운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사실은 이러한 현재형 만남이다.
과거형 만남의 질곡을 털어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열린 형태로 새롭게 짤 수 있는 현재형 만남 속에서
나는 이번에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났다.
맨 왼쪽이 나이다.
나는 이곳에선 이스트맨이라 불린다.
그 옆으로 세랑, 해든나라, 쿠마, 맷슨이다.
우리는 모두 오늘 이 시간의 지금 현재를 살고 있다. 당연히 만남도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만남에는 과거형 만남이 있다. 과거에 이루어진 만남이란 뜻이 아니라 과거에 얽매여 있는 만남을 말함이다. 과거형 만남은 몸의 만남으로 시작하여 어느 시점을 끝으로 그 몸의 만남이 그대로 굳어지며, 그리하여 과거에 완전히 포박되어 그 과거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가령 나는 대학을 다닐 때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건 몸의 만남이 먼저인 전형적인 과거형 만남이다. 그 만남이 졸업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면 모를까, 졸업 이후에는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면서 그 만남이 끊어져 버린다. 그리고 만남이 끊어진 기간 동안 각자는 애 아버지나 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여전히 혼자 살기도 하고, 또 대학 다닐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길을 가기도 하면서, 그냥 같은 학교나 같은 과를 다닌다는 한가지 연분으로 엮일 수 있었던 과거의 만남 속에서와 달리 서로의 편차가 크게 벌어져 버린다.
내가 말하는 편차란 경제적 편차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편차를 말함이다. 가령 부모가 되면서 어떤 사람은 일류대학을 성공한 삶의 분명한 기준으로 선을 그어놓고 아이를 그 선의 너머로 보내기 위해 안할 짓 못할 짓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 도시의 각박한 삶 속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이에게 정말 못할 짓이라고 여겨 고민 끝에 이곳의 삶을 정리하고 아이를 데리고 시골 구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한다. 그런 경우 인생을 바라보는 둘의 시선은 거의 한 자리에 앉아 원활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북할 정도로 큰 편차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거북함은 과연 내가 그 자리에 나가서 함께 앉아 있어야 하는지를 회의하게 만든다. 그 회의를 무시하고 대학 때 만났던 사이라는 모임의 계기를 유일한 이유로 삼아 모임에 나올 것을 강요받는 순간, 그 모임은 나에게 과거에 얽매인 전형적인 과거형 만남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사고의 편차를 생각할 때면 내가 예로 든 대학 때의 친구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마도 가장 골치아픈 과거형 만남은 일가 친척들과의 만남인 듯하다.
가령 그녀는 나와 결혼하면서 나의 일가 친척들과 만나게 된다. 그건 그들에 대한 아무런 예비된 만남이나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몸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전형적인 몸의 만남이다. 이 몸의 만남은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때부터 그녀에게 많은 것의 수용을 강요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그들과의 편차가 너무도 크다. 만약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이웃이었고, 못볼 것 볼 것을 다본 사이였다면 결혼이 가져오는 편차도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결혼한 대부분의 사이에서 그들의 만남은 서로의 과거가 전혀 겹치는 법이 없는 오직 그들만의 완전히 새로운 만남이다. 나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내게 있어 그녀가 새로운 사람이었으니 나의 일가 친척들에게 더더욱 그녀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란 점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나의 부모를 포함하여 나의 일가 친척들은 그녀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새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질 못한다. 결혼 전부터 내 여동생들과 격의없이 친했던 그녀는 내 여동생들의 이름 뒤에 “아가씨”라는 호칭을 덧붙이는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없으며, 나이어린 남동생들의 이름 뒤에 “도련님”이란 호칭을 덧붙여주는 것도 걸끄럽기만 하다. 그녀에겐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삶이 담기지만 호칭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서열화하는, 해당 체제의 질서에 대한 강요가 담겨있다. 그 질서에 민감한 우리들은 그 강요에 호락호락하게 순응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동원이형”이라고 부르며, 일가 친척들은 당혹스러워한다. 물론, 뭐, 그 정도야 양보할 수 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 호칭을 조심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남들 앞에서와 우리들 사이에서의 행동을 분리하여 대처하기 시작하는 현명함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녀에겐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삶이 있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현재형으로 가꾸어가고 있는 그녀의 삶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이런 방식으로 결혼 생활을 영위하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바로 그녀가 현재형으로 꾸려가고 있는 그러한 오늘의 삶이 그녀를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일가 친척들에게 그녀가 꾸려가고 있는 오늘 현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그들에겐 전화는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거는 것이란 생각이 확고하게 굳어져있다. 그들은 나의 그녀가 꾸려가고 있는 삶으로 그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굳어있는 자신들의 그 잣대로 그녀를 평가하려 든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그 오랜 유습의 불합리성을 한번도 반성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그것을 새로운 사람에게 강요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강요가 들어먹히지 않으면, 그녀나 나를 상종못할 사람들로 치부하며 인신공격성 폭언도 서슴치 않는다.
과거형 만남의 관계 속에서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나는 그 과거형 만남을 그 뿌리로부터 송두리째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거나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과거형 만남에 대해 속수무책인 것은 아니다. 사실 대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은 안나가면 그만이다. 일가 친척과는 연락을 안하거나 한번 대판 싸운 뒤 인연을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과거와 단절하고 싶었으며, 또 실제로도 과거형 만남을 그렇게 끊어 버렸다.
나의 그녀는 새 사람이므로 세상의 과거에 그녀의 삶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한때 나는 내가 부딪치는 과거형 만남이 너무도 지긋지긋하여 그 지긋지긋함을 그녀가 무마해주길 은근히 바라던 순간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나를 선택한 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이르렀을 때, 과거형 만남 속의 관계를 무우자르듯 잘라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과거형 만남과는 정반대의 만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재형 만남이다. 현재형 만남이므로 당연히 그 만남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법이 없다. 그 만남은 과거를 털어내 버리고 끊임없이 오늘을 만들어내면서 만남이 오늘에 살아있도록 해주고 우리들이 삶을 과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미래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과거형 만남이 몸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현재형 만남은 몸이 아니라 상대의 삶과 가장 먼저 부딪친다. 가령 가수에겐 노래가 그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화가에겐 그림이 그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같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선 글이 나의 삶이다. 현재형 만남에선 가수의 노래를 먼저 만나며, 화가의 그림이 먼저이고, 그리고 나를 만나기 전에 나의 글을 먼저 만난다. 몸을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나 그녀의 노래나 그림, 또는 글을 먼저 만나기 때문에 그 노래나 그림, 또는 글의 그나 그녀에 대한 만남을 강요받을 이유가 없다. 노래나 그림,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나 그녀를 만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여 그 글의 그나 그녀가 상처받을 리도 없다. 아마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재형 만남이 직접적인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져 지속적인 현재형 만남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한가지 문제점은 과거형 만남을 모두 털어내 버리고 이러한 현재형 만남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새로 짜기에는 평범한 일상인들이 가수의 노래나 화가의 그림과 같은 자기 표현 매체를 갖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결혼하여 애낳고 가족들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그의 일상이 그의 삶이 된다. 가정주부라면 아이들과 남편의 하루하루를 걱정하고 그들을 뒷바라지 하는 일상이 그녀의 삶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들의 일상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그러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바로 일상인들이 갖고 있던 자기 표현 매체의 한계가 깨끗이 해결된 것이다. 인터넷이란 매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블로그이다. <가을소리>의 블로그는 남편과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여자의 삶과 색깔을 그녀의 목소리를 통하여 보여준다. 나는 한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글을 통하여 일주일에도 몇번씩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그녀의 요리를 통하여, 또는 남편이나 아이들과 함께 떠난 제주 여행을 통하여,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다. <아키>의 블로그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짤막한 영화평은 영화에 대한 그녀의 기호를 드러내주며, 그것은 단순한 영화평을 넘어 오늘 현재의 그녀를 보여주는 그녀의 색깔이 된다. 그리하여 나는 블로그나 혹은 내가 활동하는 매킨토시 동호회 <맥주>의 글을 통하여, 아니면 <파인더>의 사진을 통하여 사람들과 몸으로 부딪치기 전에 그들의 생각이나 삶의 색깔과 먼저 부딪친다. 온라인 상에서의 그 만남이 축적되다 보면 이제 글을 넘어 그 사람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언젠가 그리하여 나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번개라 불리는 그 모임에 한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상당히 연배가 높았으나 주책맞게도 그날 그 자리에 있는 동안 내 나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또 그들이 나보다 어리다는 것도 전혀 인식이 되질 않았다. 그저 그곳에는 얘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얘기했고, 그 삶은 보기에 좋았으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얘기했고, 그들도 우리의 삶을 보기에 좋아했다. 내가 우리라고 말한 것은 그날 그 자리엔 그녀와 내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그녀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만남의 시작으로 보면 몸의 만남이 먼저인 과거형 만남과 매우 흡사하다. 때문에 과거형 만남 속의 인간들과 비슷한, 다시 말하여 과거에 얽매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날 위험이 매우 컸지만 그녀의 행운이었던지 그녀가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은 과거형 만남이 아니라 대부분 현재형 만남으로 진행이 되었다. 다시 말하여 나이와 사회적 위치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줄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말하고, 또 서로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서로 배우고 흐뭇해하는 현재형 만남, 즉 삶을 먼저 들여다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내 곁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으로 만남이 지속되는 현재형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아내가 꾸려낸 그 현재형 만남의 새로운 사람들을 함께 만나며 그때마다 매우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다 요몇달 동안 나는 과거형 만남이 내게 가져다주는 지겨움에 엄청나게 시달리게 되었다. 거의 한 3년 동안 연락이 없던 옛 대학 동창들을 처음으로 만났고, 근처의 대형할인매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재수없게 가까운 친척과 부딪치고 말았으며, 명절 때도 친척들을 만나야 했다. 그 만남은 대부분 나의 심기를 불편하기 이를데 없을 정도로 잔뜩 긁어놓았고, 그 불편한 심기로 인하여 한동안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답답했다.
그렇게 답답증을 앓고 있을 때 나는 <맥주>의 자유게시판에 뜬 번개 모임의 공지 하나를 보았다. 그날, 그러니까 2006년 3월 10일 금요일, 나는 그 자리에 나갔다.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그냥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혔던 숨이 그곳에서 비로소 다시 트이는 느낌이었다. 인터넷이 그 매개를 이루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 현재형 만남은 단순히 정보를 얻거나 교환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숨통을 터주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소통로로 다가서 있었다.
해든나라.
이번에 처음만났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몸의 만남 이전에 이루어진 글의 사전 교감을 생각하면 나는 그와 가장 자주 만났다. 그나 나나 사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미 우리 둘은 사진으로 서로를 수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해든나라는 곧 애 아버지가 된다고 한다. 혼자 있으면 불안해 하는 아내에게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의 마지막 모임이라고 양해를 구한 뒤 모임에 나왔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 아내되는 분한테 미안했지만 현재형 만남이 갖는 매력을 이해해 주시길.
맷슨.
그는 이 현재형 만남의 주선자이다. 그는 아는 몇몇 사람들이 거의 자유게시판과 파인더밖에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날의 번개 모임 공지를 mac on hand는 물론이고 자유게시판에도 올렸다. 그의 이러한 섬세한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이번 번개 공지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맷슨의 주선으로 만난 이 만남의 모두는 현재형 만남이 갖는 이 새로운 성격의 만남에서 만남의 행복을 누렸다.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세랑.
그는 인사동 쌈지 갤러리의 3층에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1층에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마치 수없이 만난 사람들처럼 만났다.
세랑은 전통 기법으로 만든 옻칠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전통 기법의 옻칠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명맥이 끊겼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그 불씨를 되살리고 싶은 한 젊은이의 꿈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얘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나처럼 말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은 특히 고마울 수밖에 없다.
쿠마.
그의 나이는 28세라고 했다. 부럽기 이를데 없는 젊음이 그에게 있었다.
잘 나왔을까?
디지털 카메라의 가장 좋은 점은 역시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히야, 잘 나왔네요.
그러게 말예요.
현장에서의 교감은 더욱 즐겁다.
때로 기계는 참 멍청하기도 하다.
두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건만 그 둘 사이의 공간이 비었다고 그 빈 사이로 새어나가 멀리 뒤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계가 두 사람을 놓쳐도 사람은 그 두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세랑과 해든나라임을.
이스트맨.
나는 인터넷 세상에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를 분화시켜 놓고 있다. 현재형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면서 이름까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새로운 만남의 큰 매력이다.
내 몰골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는 만남은 과거형 만남에선 사실상 거의 없다.
그날 나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모임은 저녁 7시쯤 시작되었으며 끝났을 때의 시간은 12시를 넘기고도 한참을 더 지나 밤 2시 30분경에 이르러 있었다. 언젠가의 번개 모임이 그랬듯이 이날도 나는 마치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어디 소혹성 3859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7 thoughts on “현재형 만남 – <맥주>의 번개 모임에서”
우와~~부러워요. 저도 딱 한번 서울올라가 참석한적있었는데 다시 시간내기가 왜그리 힘들던지..
그날 먹었던 아구찜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아마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식사였기때문인가봐요.^^
제가 원래 술은 소주 반병이면 취하는데
이렇게 모여서 즐겁게 떠들면서 먹을 때는
두 병을 마셔도 취하지가 않더라구요.
마지막 사진은 제가 찍은거군요^^
찍으면서 김광석씨의 얼굴과 무척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큭히 그 씨~익 웃을때 드러나는 치아와 입매가 더욱…
반갑고 즐겁고, 또 고마운 만남이었습니다^^
나도 즐거웠어요.
인터넷 세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만남에 대해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구요.
제가 이 포스트모던 세상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의미에 대해 관심이 많거든요.
덕분에 오랫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네요.
미친듯이 번개를 쫓아다니던 그때가 생각나요.
어쩌면 나는 벌써 과거형으로 맥주모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때보다는 내 일상에서 멀어져버린 것은 사실이니까요.
깨닫게 됩니다.
내게 다가왔던 소중한 인연들을 내가 너무 안이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함께 술 한잔 나누고 싶어지네요.
저는 이번이 겨우 두번째인 걸요.
황사가 덜하고 사진찍기에 충분한 빛이 얼굴을 내밀면
카메라 둘러메고 일산으로 한번 갈께요.
그리고 가기 전에 미리 문자 보내 아키님 여유도 알아볼께요.
네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