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에 가면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바로 우리의 할머니입니다. 이 땅에선 여자로 태어나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할머니가 됩니다. 할머니가 되면 내 할머니와 네 할머니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세상의 할머니가 모두 우리 할머니 같아집니다. 세상의 할머니가 너나없이 모두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할머니의 그 정겨움과 느낌이 겹쳐지는 또다른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향입니다. 어찌보면 우리에게 할머니란 사실은 고향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고향은 때로 내가 태어난 곳을 뜻하지 않고 우리들이 언제라도 가서 기댈 수 있는 따뜻한 품을 뜻하곤 합니다. 할머니도 우리의 부모를 낳아준 분이 아니라 그냥 마주하고 얘기만 나누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떤 존재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는 고향처럼 우리들을 넉넉하게 안아주는 품입니다. 나눔의 집엔 바로 그 우리의 할머니가 계십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그 이름에도 옛맛이 배어 있습니다. 이옥선, 김순옥, 박옥련. 그곳에 계신 몇몇 할머니들의 이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마 이런 이름을 지어주면 촌스럽다고 펄쩍 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촌스러움이 바로 정겨움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가지면 촌스런 느낌이 나겠지만 할머니가 그 이름을 가지면 그건 고향같은 푸근한 이름이 됩니다. 바로 그런 이름을 가진 우리의 할머니가 나눔의 집에 계십니다.
나눔의 집 할머니는 우리의 할머니라서 모두 이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령 돌아가신 강덕경 할머니는 경남 진주의 수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넉넉함을 풍기는 김군자 할머니는 강원도 평창이 고향입니다. 박옥련 할머니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면 전북 무주로 찾아가면 됩니다. 김순옥 할머니의 고향이 궁금하다면 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할머니의 고향이 평양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곳은 참 이상해서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이 땅의 특유한 정서를 공유하기가 어렵습니다. 할머니들은 모두 이 땅에서 태어나고, 당신들의 유년기를 이 땅에서 보냈습니다.
이 땅에선 여자가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되는 것은 남자가 나이를 먹어 할아버지가 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남자는 나이들어 돈과 힘을 잃으면서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모든 것을 다 내놓으면서 늙어가지만 할머니가 되면 힘을 잃는게 아니라 오히려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넓어지고 깊어진 여자는 무한한 사랑의 존재가 됩니다. 할머니는 그래서 사랑의 존재입니다. 할머니가 되면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손주처럼 여겨지며,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들도 자신의 아들과 딸로 삼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그 미래를 복되게 빌어주고, 사는 것의 힘겨움을 걱정해 줍니다. 바로 그 할머니가 우리의 할머니이며, 그 우리의 할머니가 나눔의 집에 계십니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면 만나는 그곳의 할머니가 푸근하고 인자한 우리의 할머니 모습만 갖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나눔의 집에 가면 그와 함께 상처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고통의 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일제 시대에 이르게 됩니다. 그 시대에 할머니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가 말못할 수모를 겪으며 꽃다운 시기를 타국땅에서 성의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중히 여겼던 시대에 그 수모는 곧 삶을 앗아간 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어지간한 상처는 세월이 씻어주는 법이지만 일제가 남긴 상처는 흉하고도 깊어서 세월을 약삼아 씻어내려 해도 그것은 한 생애의 세월이 다 지나도록 씻어낼 수 없는 깊은 상처였습니다. 나눔의 집에선 할머니들이 바로 그 고통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진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만신창이가 된 할머니들 앞에서 고국은 할머니를 그렇게 짓밟은 일본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머니들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이 땅은 할머니의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은 것이 아니라 그 한많은 삶을 숨겨야할 부끄러움으로 치부했습니다. 타국만리 위안소에서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고국은 할머니에게 또 한번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고국에서 상처는 치유된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들의 상처에 약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을만큼의 깊은 상처임에 틀림없지만 그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치료약이 일본의 경우엔 그들이 저지른 죄가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란 것을 알고 있으며, 이 땅의 우리가 마련해야할 치료제는 할머니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보살핌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이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과거를 사죄하고 할머니들의 삶을 위로하고 갑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의 우익인사들이 무슨 행사하듯 정기적으로 위안부 동원 사실을 부정하면서 할머니들의 상처를 덧내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할머니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정부의 미온적 태도가 할머니들의 가슴에서 버림받은 소외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나눔의 집엔 바로 그 아프고 고통스런 할머니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눔의 집에 가면 고향의 품 같은 우리의 할머니, 그리고 일제가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고통의 할머니를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또다른 할머니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어서는 할머니입니다.
원래 할머니는 일어서질 못하셨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처녀를 끌어갔을 때, 이미 젊은 시절 할머니의 무릎이 꺾였고, 그 뒤엔 상처가 깊어 고통을 추스리며 사는 것도 힘겨웠습니다. 또 고국의 무관심이 서운하여 누구에게 손내밀고 일어설 기력을 얻기도 어려웠습니다. 할머니는 입을 닫고 지냈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사셨습니다.
그러다 1991년 8월 14일, 할머니 한 분이 침묵으로부터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혔습니다.
할머니가 일어나 그 사실을 말하는 순간, 숨겨두어야 할 수치였던 어두운 할머니의 과거가 일본이 사죄하고 배상해야할 추악한 일본의 죄악이 되었습니다. 한분 두분 동참하는 할머니들이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아니라 묻혀있던 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의 고난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역사 그 자체였으니까요.
할머니가 한 번 말할 때, 역사가 무릎을 조금씩 세웠으며, 두 번 말할 때, 역사는 허리를 조금씩 폈습니다. 할머니들은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시위를 합니다. 모두가 입을 한데 모아 외칩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배상하라!”
목소리를 더 키워, 멀리 일본까지 들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듯이, 대구에서 새벽같이 올라온 이용수 할머니께서 어김없이 그 자리에 함께 하며, 나눔의 집 할머니들도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을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 가운데서도 몇몇 분이 매주 수요일을 잊지 않고 챙겨 그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아픈 다리 때문에 할머니들은 시위 내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할머니들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 계신 것입니다.
그날 시위에 나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가 이미 할머니들에겐 시위의 시작이며, 한걸음 한걸음이 구호이고 싸움입니다. 또 할머니들의 뒤에선 항상 젊은이들이 시위에 함께 하며 내내 일어서 있습니다. 마음을 함께 하기에 그 시간 젊은 사람들의 다리는 할머니들의 다리입니다. 때문에 할머니들은 앉아 있지만 사실은 일어서 있습니다.
나눔의 집에 가면 바로 그 일어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래서 나눔의 집에 가면 세 가지 모습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향같은 따뜻한 품, 바로 우리의 할머니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근대사의 상처를 안고 아직도 그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아픈 할머니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모습의 할머니가 있습니다. 바로 어깨를 부축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남은 힘을 다해 일어서고 계신 할머니입니다. 그렇게 나눔의 집에 가면 우리는 우리의 할머니, 아픈 할머니, 그리고 일어서는 할머니를 만납니다.
4 thoughts on “나눔의 집엔 세 할머니가 계시다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10”
상처를 내보일 수 있을 용기,
그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온 할머니들은
그래서 더 아름다우세요.
그건 보통 용기가 아닌 거 같아요.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게 할머니들에겐 과거의 일이 아닌 듯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오늘도 할머니들은 일어서는 할머니가 되셔서 대사관 앞에 계셨겠네.
우리에게 할머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시는 날이 있으려나…
연세가 많으시고 아프셔서… 많이 안타깝다…
상처야 씻겨지기 어렵겠지.
그나마 저렇게 활동하는 할머니들은 나은 편이야.
아직도 사진찍히는 거 마저 두려워하면서 혼자 사는 할머니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