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3월 25일),
김포에 내려갈 기회가 생겼다.
그곳에 별장을 갖고 있는 아는 사람이
여러 사람을 그곳으로 불렀고,
나도 그 일행의 하나로 끼여 있었다.
그 아는 사람의 이름은 이승재씨이다.
도착하고 나서 처음엔 근처의 밭으로 조금 발길을 들여놓았지만
그 발길은 결국 숲속으로 이어졌다.
바삭거리는 낙엽과
막 움을 틔우고 있는 꽃몽오리에 시선을 뺏긴 나는
일행을 버린채 혼자 산속을 가며 내내 그들과 놀았다.
승재씨가 전화를 걸어 빨리 내려오라는 독촉을 전할 때까지
나는 김포의 한 작은 산 속에 있었고,
그곳에선 봄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봄을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로 알고 있지만
봄은 사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봄의 숲길엔
여전히 지난해 한해살이를 마감한 낙엽들이
길의 채색을 이끈다.
그래서 그 길의 주된 색조는 갈색이다.
자연이 생을 마감하고 나면
그 자리는 텅비거나 아니면 갈색으로 변색된다.
봄은 그 죽음이 여전히 완연하게 남아있는 계절이며
초봄에는 그 빛이 더더욱 완연하다.
잎은 푸르게 살아있을 때면
오히려 말이 없다.
바람이 흔들어도 그냥 몸만 내 맡길 뿐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생이 마감되면 그때부터 잎은
끊임없이 바스락거리기 시작한다.
봄철의 날씨가 주의를 요할 정도로 건조해지면
더더욱 그 바스락거림은 커진다.
살아있을 때 삶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던 잎은
죽어서 비로소 입을 열며
때문에 숲길을 갈 때면
잎들의 속삭임이 그득하다.
숲길을 지키고 선 나무둥치엔
어느 곤충이 벗어던지고 간 허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허물을 벗는 곤충은
한번 허물을 벗을 때마다
그간의 삶을 그 허물에 싸서 버린다.
하지만 허물의 속은 텅비어 있다.
그러니 어찌보면 그건 텅빈 죽음이다.
봄의 한쪽에 그렇게 텅빈 죽음이
나무둥치에 매달려 있었다.
가지 끝을 떠나 땅으로 떨어진 도토리 한 알이
여전히 속을 채운 채 가랑잎 사이에 앉아 있었다.
속이 찬 도토리는 작아도 충만으로 가득하다.
충만은 원래 우리가 수확의 자리에서 거두는 기쁨이지만
수확의 시기를 지나고 나면 그 충만은
마감된 생의 다른 이름이 된다.
봄에는 그렇게 지난 가을에 마감된 생이
여기저기 그대로이다.
사람은 죽으면 마감된 생을
우리 사는 곳에서 멀찌감치 치워놓지만
자연은 삶이 있던 자리에 죽음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제 생명이 움을 틔워올리기 시작한다.
마감된 생이 온통 갈색인 반면
새롭게 움을 틔우는 생명의 채색은 그와는 완연히 다르다.
생명의 채색은 푸르다.
봄철에 처음피는 잎은 여리다.
바람만 불어도 상처받을 것처럼 여리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갖태어나는 것이 여리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여린 아이가 태어나 울음으로 제 생명을 알렸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잎의 연두빛은 어찌보면 가지 끝에서 색깔로 피어나는
아이의 울음과 같다.
그러니까 봄에 피는 연두빛 여린 잎은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응애”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의 채색이 연두빛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진달래나 철쭉의 나무가지 끝에서 생명의 채색은
짙은 분홍빛으로 몽우리를 잡는다.
연두빛이 가장 생명감에 가까운 색깔이긴 하지만
사실 그 빛은 모든 이파리의 공통된 색이어서
그렇게 이파리로만 봄을 칠해가면
채색이 너무 단조롭게 될 것이 뻔하다.
우리가 그런 단조로움을 염려할 때
그 염려를 접어주는 것은 역시 꽃이다.
꽃들은 연두빛의 단조로운 봄을 화려한 컬러로 치장해준다.
생강나무는 노란꽃으로 봄의 치장에 동참한다.
그러나 모든 꽃이 봄을 치장하기 위해 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제비꽃이 그럴 것 같다.
제비꽃은 제비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핀다.
제비를 맞으려면
제비보다 늦을 순 없다.
그러니까 제비꽃은 봄을 치장하려 핀다기보다
제비를 마중나가려는 마음이 급할 때
그 자리에서 피는 꽃이다.
봄에는 그렇게 죽음과 삶이 한자리에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면
그 죽음과 삶은 그저 자리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죽음이 삶을 밀어올리고 있다.
이 봄에 낙엽의 한가운데서
파랗게 삶을 시작하는 이름모를 풀의 생명은
사실은 그 밑거름이 지난 가을 삶을 마감한 낙엽들이었다.
봄은 죽음과 삶이 그냥 한자리에 있는 계절이 아니라
그러므로 죽음이 삶을 일깨우는 계절이다.
봄에는 돌도 생명을 얻는다.
사람들이 숲을 지날 때마다
돌을 하나 둘 쌓기 시작하고,
그러면 돌은 나무처럼 자라기 시작한다.
돌탑이란 돌이 생명을 얻어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의 일종이다.
그러니 겨울엔 돌탑을 돌탑이라 부르더라도
봄에는 그것을 돌탑이라 부르지 말고
돌나무라 불러볼 일이다.
봄에 생명감을 얻는 것이 어디 돌 뿐이랴.
논과 밭도 꿈틀대기 시작한다.
혹자의 눈엔 그저 논과 밭을 갈아엎어 놓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겨우내 대지로 납짝 엎드려 조금의 요동도 없이 겨울을 난 논과 밭이
이 봄에 드디어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기 시작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승재씨에게 물었더니 이곳의 마을 이름이
숲속산새마을(김포 고양2리)이라고 했다.
산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 숲속산새마을에서 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6 thoughts on “봄이 기지개를 펴다 – 김포 숲속산새마을에서”
저도 돌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했던 거로군요. +_+
스스로의 소망을 빌고자했던 이기적인 생각이었는데, 돌탑에겐 돌나무로의 생명이었다니.
감개무량합니다. 😉
그 생명의 비밀을 이렇게 만나다니.
감동, 감동!
다음에 산에 가실 때도 꼭 하나 얹어주고 가시는 거 잊지 마시길.
우와~~제비꽃!! 너무 이쁘네요.
자 요며칠 제비꽃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저희 동네엔 그냥 보라색 제비꽃만 피는곳도 있고
가장자리에 흰 줄이 그어진 제비꽃도 많이 피었었거든요.
아직은 이른지 안피었어요.
예쁜 것 찾아서 좀 헤매고 돌아다녔죠.
다들 한두 송이만 피어 있어서 요걸 찾느라고
밭주변을 많이 돌아 다녔어요.
근데 가을소리님 블로그가 최신 판으로 업데이트되면서
제가 댓글을 달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요.
저는 사파리라는 좀 희귀한 브라우저를 쓰고 있거든요.
태터가 맥에서도 원활하게 개선이 되면
댓글을 달겠습니다.
사진&글 잘 보고 갑니다. 🙂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