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세상

세상 어느 것도 색을 독점하는 법이 없다.
붉은 색이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도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나누어 갖고 있다.
실제로 색을 홀로 독점하면 저만 붉지만
붉은 색을 나누면 세상을 모두 붉게 물들일 수 있다.
오늘은 올해 내가 만난 붉은 것들의 세상으로 가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1월 2일 남한산성에서

먼저 가까운 가을부터 시작한다.
역시 가을의 붉은 색은 단풍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단풍은 한여름 내내 초록빛으로 차분하게 살다가
가을에 드디어 붉게 불붙는다.
지금 조용하고 차분하다고 평생 그렇게 살지는 아무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0월 21일 길동의 한 음식점에서

붉은 전등은 시도 때도 없이 붉다.
물들기를 기다리기 어려운 사람들은 붉은 등을 켠다.
또 잠깐 물들고 가는 아쉬움으로 만족할 수 없어 붉은 등을 켠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9월 8일 천호동의 한 중국집을 지나며

도시에서 붉은 등은 그 붉은 빛을 따라가면
가을의 붉은 단풍을 볼 때처럼
마음을 계절의 감성으로 채울 순 없어도,
그러나 배는 채울 수 있다.
마음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고프면 그것도 마음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9월 6일 강남역 근처에서

붉은 색이 단풍과 붉은 전등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람들도 붉은 색 옷을 입는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고 하면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이지만
그 제목만으로 그림 이상의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그림에선 귀걸이가 잘 눈에 띄질 않고 소녀만 눈에 들어오지만
제목에선 진주 귀걸이가 단순한 장식품을 넘어 소녀를 이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그 여인이라고 하면 밋밋해지지만
“붉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이라고 하면
붉은 색 옷이 단순히 그녀가 입고 나온 옷을 넘어 그녀를 이끌기 시작한다.
옷도 특히 붉은 색의 옷은 그냥 옷이 아니다.
한 때 그것은 온나라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었던 색깔의 옷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9월 3일 한강에서

사람들은 장미가 여러가지 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장미하면 반사적으로 붉은 색을 떠올린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장미는 여러가지 색을 가졌지만
역시 장미는 붉은 장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6월 10일 우리집 마당에서

장미는 한창 때만 붉은 게 아니다.
장미는 갈 때도 붉다.
단풍이 한창 때 초록으로 살았던 것과는 판이하다.
장미는 붉게 와서 붉게 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9월 1일 둔촌동 가르텐비어에서

감정도 색을 가진다.
우울은 회색빛으로 밀려들고, 냉정은 푸른기가 돈다.
그러나 사랑은 붉은 색을 띈다.
사랑은 붉게 빛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8일 8일 잠실 신천에서

사람도 붉게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조명탓이다.
하지만 때로 그것이 조명탓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열정의 다른 이름으로 읽힌다.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김세랑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게 보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7월 27일 남양주 봉선사 연꽃단지에서

고추잠자리가 붉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진짜 고추잠자리는 머리부터 꼬리끝까지 붉다.
그런데 개중에 몸통만 붉은 것들이 있다.
사실 고추잠자리라 불리는 대개의 것들이 그렇다.
나는 그럴 때면 저 고추잠자리는 아직 덜익어서 그렇다고 농담을 하곤 했지만
그런 잠자리는 고추잠자리가 아니라 고추좀잠자리이다.
고추잠자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붉다.
고추잠자리는 이제는 보호종이 되어 잡다 걸리면 벌금문다.
그냥 사진만 찍어야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7월 27일 남양주 광릉에서

나무는 원래 제 색이 있었지만
대개 건물의 기둥이 되면 다른 색을 뒤집어 쓴다.
특히 궁궐같은 경우엔 붉은 색을 뒤집어 쓴다.
붉은 색을 뒤집어쓰고 살다가 세월이 흐르면
원래 갖고 있던 색을 슬그머니 내비친다.
우리는 색을 뒤집어쓴 나무 기둥처럼 다른 색을 뒤집어쓰고 살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자기 색을 천천히 내비칠 때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7월 25일 양수리 세미원에서

백일홍이란 꽃이 있다.
꽃의 이름만으로 보면 100일 동안 붉게 피는 꽃이다.
석달하고 열흘이니 상당히 긴 시간 붉게 산다.
백일홍은 여름꽃이다.
뜨거운 여름에 핀 백일홍은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군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7월 12일 인사동에서

파란 옷을 입은 여자가 노래부르고
빨간 옷을 입은 남자는 기타를 쳐준다.
옷의 색깔로 보면 정반대일 것 같은데
둘이 음악으로 하나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4월 26일 올림픽공원에서

멀리 남산으로 해가 진다.
저 혼자 붉은 게 아니라 그 주변의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해는 매일 저녁 붉은 색을 세상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간다.

6 thoughts on “붉은 세상

    1. 예전에 마틴파 사진전에 갔더니 색을 주제로 사진을 찍은게 있었는데 그렇게 일정 주제로 사진을 모아보는 것도 재미난 일 같아요.

  1. 하루 쉬시더니…
    멋진 작품들을 한번에 올려 주셨네요. 눈이 막 부시려고 해요^^
    고추 잠자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붉은 색이네요. 마치 모형처럼.

    1. 와~ 댓글 창이 바꼈네요 ㅎㅎ
      그러시지요~
      빨강에서 노랑으로…
      forest님 뒤를 졸졸 따라가고 계시는거 아시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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