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달리 남산은 서울의 남쪽에 있지 않다.
남산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산이 서울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남쪽 변경에 그 산을 두었던 서울은
계속 몸집을 부풀린 끝에 결국은
그 품의 한가운데 남산을 두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요즘 남산을 오를 때의 느낌은 이중적이다.
보통 산은 어느 산이나 오른다는 느낌이 강한 편인데
남산은 동시에 깊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르면서 동시에 깊숙이 들어간다.
그때의 느낌은 매우 은밀하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은 항상
깊숙한 한가운데 내밀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4월 15일 토요일,
나는 장충동의 국립극장을 시작점으로 하여
남산을 올랐다.
아니, 남산의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갔다.
초입에서 벚꽃을 만났다.
벚꽃은 하얗다.
누군가 눈처럼 하얗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다면
벚꽃은 어찌보면 우리들이 아직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지난 겨울 그 하얗던 눈의 추억으로 피는 꽃이다.
분홍빛 진달래가 나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리고는 말한다.
“눈의 추억은 버려.
이제 세상을 분홍빛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진달래의 분홍빛은 화사하다.
나는 그 분홍빛의 따사함에 녹아들며
미련없이 눈의 추억을 버려버렸다.
눈의 추억을 버리는 순간,
그때부터 벚꽃은 그냥 하얀 꽃이다.
하얀 꽃은 빛처럼 환하다.
가로등이 숙면에 든 한낮의 남산길에선
하얀 꽃이 길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분홍과 더불어 노랑도 봄의 빛깔이다.
개나리가 이끌고 오는
그 빛은 재잘재잘거린다.분홍과 더불어 노랑도 봄의 빛깔이다.
개나리가 이끌고 오는
그 빛은 재잘재잘거린다.
아무래도 화사하게 차려입은
젊고 곱디고운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외출하는 것이
봄의 남산인 것 같다.
한자리에 자리한 진달래와 개나리의 느낌이 그렇다.
진달래와 개나리 가운데서
개나리를 앞세웠을 때의 느낌은
줄지어 산을 오르는 조막만한 아이들의 뒤에서
멀찌감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부모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흠흠, 하얀 꽃이 무엇인가를 호흡하려는지
목을 길게 뽑아들었다.
아래쪽에서 남산의 소나무가
짙은 솔향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남산의 길은 정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숙이 속으로 속으로 들어간다.
남산이 허리춤에 꾀차고 있는 순환도로 위에서도
오늘은 하얀 꽃들이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다.
꽃들은 모두 가지를 타고 올라가
하늘 높은 곳에서
펑펑펑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낮에 보는 폭죽의 축제라…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오호, 이런이런.
남산의 깊숙한 한가운데서 나는
이제 꽃에 갇혔다.
꽃에 갇히는 것은 꽃의 가슴에 갇히는 것이다.
꽃의 가슴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꽃은 그 자태와 색깔, 그리고 향기로
우리들을 마취시킨다.
꽃에 마취되면 우리들의 의식은 몽롱해지고
그 가슴에 갇혔을 때
행복하고 황홀하다.
나는 갇혀있으면서도
갇혀있음을 모른다.
남산의 한가운데서 나는 그렇게 꽃에 갇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꽃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지를 따라 걷고 있다.
가지가 휘어지면
꽃들도 그 굴곡을 따라 휘어지며
가지의 길을 함께 따라간다.
그 뿐만이 아니다.
꽃들은 내가 걸어가면 나를 따라온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던 걸음을 일으켜 세워
슬슬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길을 내내 꽃들이 함께 해주었다.
꽃들과 함께 걷기 시작한 나는
그때부터 슬슬 장난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난질을 치다보니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열매이기도 하다.
같은 꽃이라도 피어나면 꽃이지만
주렁주렁 달려있으면
그때는 열매이다.
맛은 어떨까?
따먹어 보진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옛기억을 떠올렸다.
시골서 자란 내게 있어
이 하얀 꽃, 그러니까 벚꽃은
항상 개구리알을 연상시켰다.
서울서 자란 사람들은 그 개구리알의 자리에
팝콘을 대신 채워넣곤 했다.
나는 팝콘보다는 개구리알의 상상력을 더 좋아한다.
벚꽃이 개굴개굴 울어대는 상상으로 키득키득 댈 수 있기 때문이다.
내려와서 올려다보니
남산타워가 꽃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남산은 산이 아니라 꽃의 바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남산은 높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춘 산인 셈이다.
나는 산을 오르면서 바다 속 깊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바다를 빠져나올 때는 장난질의 즐거움도 있었다.
그래도 옷은 하나도 안젖고 말짱했다.
9 thoughts on “꽃의 품에 갇히다 – 남산에서”
와~~~^^ 도로변 벚꽃길 밑에 사진 너무 예뻐요.^^
햇살이 쏟아져 더욱 눈부셨을것같은 풍경이네요.
남산에 가본지가 언제인지..ㅜㅜ
계단 하나씩 오르며 정다웠던 길이어서 생각만해도
그리워져요.^^
저 참 예전의 그 조 사진 다시 다운 받았어요.^^
이젠 셔틀버스 이외에 차를 못다니게 하기 때문에 아주 좋아요. 거의 벚꽃 터널이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나갈 때까지 이어지다 시피 하죠. 이번주 주말이면 벚꽃은 다 질 것 같아요. 5월에는 철쭉을 찾아 소백산이라도 갈려구요.
어마나~ 남산이 이렇게 이뻤나..싶어요~
항상 야경보는곳으로만 생각했던 지라..헤헤
님 사진 덕분에 꼭 같다온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요즘은 보기힘든 진달래도 보게되는군요(저만그런가^^:)
저도 놀랐어요. 남산에 수없이 갔지만 정말 남산이 이렇게 예뻤나 싶더라구요. 어찌나 정신없이 사진을 많이 찍었던지 토요일날 찍구 월요일날 겨우 정리가 끝났다는…
사진이 너무나 이뻐서, 제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지정했어요. (…)
가을소리님처럼 ‘사진자유이용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미 저질러 놓고 용서를 구하는..흑흑 ㅠ_ㅠ
잘 하셨어요. 개인 용도로 이용하는 것이야 항상 허용되는 거잖아요. 또 이용해주시는 게 저에겐 고마운 거고. 배경화면으로 즐길만하다는 것은 저에겐 그저 고마울 따름이예요.
이상하리만치 올해는 유난히 봄에 대한 느낌이 강렬한 것 같아요.
온통 꽃으로 도배된 풍경을 보자니, 마음이 울컥하네요.
분명 지난해도 꽃은 피었을 텐데, 정말 지난 해도 꽃이 피었던 것일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 지난해 4월의 사진을 보니 분명 꽃을 찍었는데 그냥 퍽퍽 찍어놓은 느낌이 너무 난다는… 힘든 일 겪고 봄을 맞아서 그런 건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