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까이 두고 사는 것에 대해선
변화에 대해 감각이 무디다.
아내나 남편, 또 아이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로 눈앞에 있어
그 변화를 감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변화는 손톱만큼씩 아주 느리게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
자연 또한 내게 그러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도
나는 자연은 항상 똑같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이미 자연의 품 안에 있었고,
그 코앞의 짧은 거리에선
미세하게 진행되는 자연의 변화를 감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시골 살 때
자연은 내게 있어 돌처럼 굳어있었다.
굳어있으니 무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나가면
산이나 들판보다는 그곳의 바람과 놀기를 즐겨했다.
그러던 내가 자연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며,
끊임없이 낮빛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서울로 삶의 거처를 옮긴 다음이었다.
마치 몇년만에 처음보는 아이들에게서
훌쩍 커버린 느낌을 확연하게 받듯이
가끔 찾게 되는 자연은 그때마다 느낌을 확연하게 달리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같은 산이라도
여름산과 겨울산의 느낌은 그 차이의 진폭이 극과 극이다.
여름산은 넘쳐나는 초록의 바다이다.
그래서 여름산에선 산을 간다기 보다
그 초록의 바다를 유영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겨울산은 그와 달리 우리를 맞을 때면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는 겨울에 산에 갔을 때
더욱 산에 간 느낌이 강했다.
지난 4월 21일 금요일, 나는 강화의 고려산을 찾았다.
그동안 나는 이산저산을 오르면서
산하면 그 느낌을 비슷하게 받은 적이 많았으나
그날 고려산은 그 느낌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산의 초입에서 만난 나무는
그 형상만으로 보면 아직 겨울 그대로였다.
원래 봄엔 나무들이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그 한모금의 물로
겨우내내 시달려온 그 오랜 갈증을 단숨에 가슴 속 깊이 풀어낸다.
그리고 그때 가슴 깊이 퍼진 시원함은 푸른 잎사귀로 나타난다.
하지만 산의 초입에선 만난 나무는
겨우내내 그랬던 것처럼
가지 사이를 숭숭 바람이 드나들도록 열어놓고
하늘을 호흡하고 있었다.
아직 나무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드디어 나무는
하늘의 호흡을 버리고
목을 축인 한모금의 물과 그것이 가져다준 가슴깊은 시원함을
푸른 잎사귀로 내뿜고 있었다.
나는 아직 목이 마르지 않았으나
그냥 물을 한모금 마시고 싶었다.
한모금의 물을 들이키는 순간
나무처럼 푸르게 잎사귀를 내뿜을 것 같았다.
원래 진달래는 그냥 진달래이지만
고려산을 오르는 길목에서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진달래는
일종의 징조이자 예감이다.
그것이 무엇의 징조였는지는
고려산을 올라본 사람들은 모두가 안다.
분홍빛 입맞춤.
그들의 입맞춤은
바람이 흔들어도 떨어질줄 몰랐다.
꽃은 그 색으로 봄을 물들인다.
진달래가 피어난 곳에서
봄은 분홍빛이다.
오호, 보셨는가.
바로 이것이 겨울의 갈증을 풀어낸
봄의 신록,
한모금의 물이 가져다준
가슴깊은 시원함이다.
이쯤에서 나도 물을 한모금 마셨다.
분홍빛 징조의 예감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우리는 정상의 턱밑에서
바로 이러한 풍경을 만난다.
띄엄띄엄 피어있으면 진달래꽃이지만
그 꽃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때부터 분홍빛 바다가 된다.
그 바다는 산의 사면을 타고
분홍빛으로 일렁인다.
내가 분홍빛 바다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보라.
분홍빛 물결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 분홍빛 바다는
이러한 분홍의 물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분홍빛 파도가 일제히 하늘을 향하여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한가운데 누워있었다.
모래가 아니라
낙엽으로 이루어진 해변을 보았는가?
여기 분홍빛 파도가 몰려왔다 가면서
그 흔적을 하나 떨구고 갔다.
무슨 옷을 입고 갔든
이때쯤이면
자신의 옷을 한번쯤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선 누구도 모든 것을 제 빛으로 물들일 듯한
진달래의 분홍빛 색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분홍빛 실개천.
손에 손잡고,
무리를 이루어,
와, 소리를 지르며,
올라가자, 저기, 산꼭대기로.
분홍빛 바다의 좋은 점.
그 바다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나는 저 바다의 한가운데 있었다.
어느 기적의 바닷가에선
바다가 갈라져 길이 된다지만
여기선 봄에 잠깐
길의 양옆으로 분홍빛 파도가 일며
그 길을 감싼다.
여기선 있던 물을 내쫓고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니라
있던 길을 그대로 두고
분홍빛 파도가 몸을 일으켜 세워
그 길을 파도의 한가운데로 둔다.
조심조심.
분홍빛 물결이 이렇게 거센 곳도 있다.
진달래의 분홍 파도는 그 끝에서만 파도가 인다.
아마도 그 파도의 아래쪽을 내려다본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아래쪽의 앙상한 가지는 완연한 겨울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진달래의 분홍도 겨울끝에서 오는 것이다.
겨울이 이만치 있다면
저만치에 봄이 있다.
그것도 분홍빛 봄이.
그 분홍빛 봄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드디어
온산이 봄으로 넘친다.
산은 계곡에 진달래를 담고
봄기운을 피워올리고
그것으로 하늘을 물들인다.
하늘은 색은 푸른색이지만
그래서 봄엔 봄기운에 물든다.
그 봄기운의 바로 곁으로
몸을 가까이 가져가 보라.
그럼 누구나 분홍빛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저 몽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
전에 나는 저 몽우리 속에
분홍빛의 여린 꽃이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오늘 저 몽우리 속에 분홍빛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려가는 길.
나무들 사이로 언듯언듯 진달래가 내비쳤다.
내게 손흔들어
안녕을 인사하는 것 같았다.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산을 내려갔다.
그 여유가 내내 좋았다.
15 thoughts on “그 산에서 나는 분홍빛 바다를 보았다 – 강화 고려산”
와우! 진달래 바다가 아주 장관이군요 >_<)b 다음해엔 꼭꼭 가보아야겠어요!!!
요 옆산도 아주 진달래가 많다고 들었어요. 서울에 사시면 가까우니까 가볍게 한번 다녀올만 한 것 같아요.
제 어릴적 기억도 저렇게 많은 진달래 속에서 이리 저리
정신을 놓을정도로 꽃을 꺾다가 길을 잃은듯해요.^^
정작 집에올땐 꽃한송이 들려있지 않았고 사탕봉지였던것이 우습네요.ㅋㅋ
저는 저런 진달래 군락지는 이번에 생전 처음 봤어요. 바로 요 옆의 좀더 험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도 이에 못지 않은 군락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소백산 철쭉도 보고 싶어 졌어요.
저도 사진 잘보고 갑니다^^
뭔가 전개되는 것이 있으니 더 좋군요.
아이구, 이렇게 찾아주시고… 고맙습니다. 사진놓고 얘기를 곁들이는게 저의 즐거움이죠.
으헙! >.<''' 역쉬 다르긴 다르네요. 분홍빛 바다가 화악 살아나는 걸 보니... ㅠ.ㅠ 하지만, 하지만... 전 염장은 안받아요. 무거운건 딱 질색이거든요. 헤헤
매일 사진만 찍으러 다니고 있네요. 오늘도 갑자기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한강으로 나갔다 왔다는… 마음은 내 것인데도 왜 이렇게 다루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마음이 내께 아닌가부죠.. ㅋ~
봄바람타고 날라갔나부다
아무래도 그런가벼.
그럼 내일부턴 어디가서 내 마음이나 찾아봐야 겠다.
분홍빛 바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
그날 바로 코앞에 있어서 사진을 못찍었어요. 못내 아쉬워요. 다음 기회가 있을 거예요,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