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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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나 버스, 기타 탈 것과 달리
지하철은 사실 앞뒤가 잘 구별이 되질 않는다.
실제로 나는 지하철의 뒤쪽에도
앞쪽과 똑같이 운전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지하철을 타고 갈 때면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지하철이
이 지하철의 앞쪽 운전자가
앞쪽으로 운전을 하며 지하철을 끌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뒤쪽 운전자가
뒤쪽으로 후진을 하며 지하철을 밀고 가는 것인지
그것이 헷갈리곤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지하철은 앞뒤가 따로 없는 셈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간다고 하면 앞으로 가는 것이었고,
뒤로 간다고 하면 뒤로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지하철이 역과 역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검은 어둠을 일색으로 하는 공간을 지나갈 때면
열차가 이쪽으로 가는지, 아니면 저쪽으로 가는지
그 방향을 상실하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갈 때면
쓸데 없는 상상을 하며 키득키득대곤 했다.
가령 내가 주로 타고 다니는 5호선은 도심으로 들어갈 때면
길동 – 강동 – 천호 – 광나루로 이어지는 흐름을 타고 간다.
나는 상상력 속에서 그 흐름을
강동 – 천호 – 광나루 -길동으로 바꾸어 놓거나
아니면 그것을 아예 전혀 색다른
샌프란시스코 – 파리 – 런던 – 뉴욕으로 바꾸어 놓는다.
지하철 속에선 역과 역 사이의 풍경이 까맣게 지워지기 때문에
역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은 전혀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없다.
그리고 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두가 적지 않게 당황한다.
어, 이상하다. 내가 지하철을 잘못탔나?
내가 키득거리는 것은
바로 그때 사람들의 당황한 표정을 상상하면서 이다.
지상에선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
지상에선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의 풍경이 완고하여
그것을 쉽게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상에서 길을 갈 때 우리는 표지판이 없어도
길을 따라 흐르는 풍경을 보면서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짐작한다.
그러나 지하철에 몸을 담는 순간,
그런 풍경은 없다.
역과 역 사이는 어디나 모두 한결같이 까맣다.
역도 그저 그 역을 말하는 문자들로 구별될 뿐이다.
때문에 내가 역을 뒤섞어 놓으며
사람들의 당혹스런 표정을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키득거리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시인 이민하 탓이다.
그의 시집 『환상수족』을 펼쳤을 때,
그는 내게 시집의 첫머리에서 “문(文)에 기대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부터 지하철을 탈 때마다
지하철의 표지판 속에서 문자들을 떼어내
내 마음대로 뒤섞으며 키득대곤 했다.
오늘도 지하철은 많은 사람들을 싣고 달리고 있다.
정해진 역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순서대로 거쳐가며.
난 알고 있다.
문에 기대면
지하철이 지금 머리를 드러내는 것이며,
또 꼬리를 감추며 다음 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문에 기대지 않으면
그 순간 지하철이 갈 곳은 내 마음대로이며,
머리와 꼬리도 얼마든지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
굽은다리역에서 지하철을 올라탄 나는 광화문에 이를 때까지
지하철을 내 마음대로 몰고 간다.
하지만 한번도 탈선한 적이 없었다.
당신도 한번 타보실려우.
지하철의 역들이 모두 뒤죽박죽인
이민하의 그 지하철을.
나는 한번 타본 뒤로 크게 매력을 느껴
자주 그걸 타고 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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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감추다.
2 thoughts on “머리와 꼬리 – 이민하 시집 『환상수족』에 대한 단상”
사진으로만 봤을때는 저 지하철이 전진하고 있는 건지 후진하고 있는건지 정말 모르겠네요.
난 지하철안에서 내릴문 안내방송을 들을때마다 달리고 있는 방향을 감지해내기 위해 잠시 신경을 집중하곤 했는데, (가끔은 틀리기도 하고… ^^;;) 아마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가봐요. 다행이다. ㅋ~
혹시 아키랑 이민하랑 다들 지하철의 앞뒤를 슬쩍 틀어놓기 위해 공모한 한 패거리들 아냐? 처음엔 이민하에게만 모든 혐의를 뒤집어 씌웠는데 이제는 아키도 의심이 가는 군. 아, 그리고 아키의 얘기를 빌려 위의 글을 약간 보강합니다. 블로그 댓글, 이거 정말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