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느와르 세잔전 입장권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르느와르 세잔전을 봤다. 언제나 그렇지만 원화가 주는 감동이 컸다. 세잔의 그림도 있었지만 르느와르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세잔의 그림이 갖는 변화가 이해되기도 했다. 같이 전시회를 본 그녀가 세잔의 그림이 평면적 느낌이 강하네라고 했다. 르느와르와 세잔이 같은 자리에 있어 그런 느낌이 확연해졌을 것이다. 나도 똑같이 느낀 점이었다. 그림을 짓누르게 되는 현실감의 무게를 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상주의 화가인 르느와르의 그림도 사실은 그런 변화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화가들은 현실의 대상을 그리면서도 그림이 풍기는 현실감을 버리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그리지만 현실을 넘어서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림이란 예술의 힘을 빌어 열고 싶은 것이 화가들의 꿈인지도 모르겠다는 소리이다.
전시작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르느와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과 살짝 달랐다는 점이다. 마치 탈색된 <피아노 치는 소녀들> 같았다고 할까. 이 작품이 같은 제목으로 두 개의 판본이 있는가 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판본은 좀 더 선명한 편인데 이번 작품은 뒤쪽의 커튼이며 피아노 위의 악보며 많은 부분들이 흐릿했다. 언젠가 널리 알려진 그 작품도 보고 싶다.
그림의 위력을 전시회를 보러온 여자들이 증명해 주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뚱뚱한 여자들이라고 생각했을 여자들이 르느와르의 그림 속에서 걸어나온 여자들로 보였다. 르느와르는 뚱뚱한 여자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한 현실의 이미지를 뒤흔들어 그의 그림 속 아름다운 여자들로 뒤집었다. 그림의 위력이 대단하다 싶었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에서 걸어나온 여자들이 많았다. 르느와르의 그림 세계에 뚱뚱한 여자는 없었다.
<<파스텔 저널>>의 최근 호에서 읽은 편집장 앤 헤브너의 글이 생각나는 전시이기도 했다. 그 글에서 앤은 “우리 시간의 대부분은 직장에서, 식탁에서, 시장에서의 작은 순간들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은 그런 순간을 화폭으로 옮긴다. 그렇게 그림으로 옮겨가면 일상의 순간들은 예술이 된다. 르느와르와 세잔의 그림들도 그에서 예외가 아니다.
화폭으로 옮겨 예술이 될 순간이라면 옷을 벗은 맨몸의 순간이나 목욕하는 순간도 소중해진다. 순간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림들이 이어졌다. 뚱뚱하다는 생각의 오염을 깨끗이 지워버린 아름다운 몸을 만난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