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호흡이 되어준 아름다운 과거에 보내는 헌사 – 안두순 교수의 에세이집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읽고

삶의 호흡이 되어준 아름다운 과거에 보내는 헌사 – 안두순 교수의 에세이집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읽고

1. 에세이집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저자인 안두순 교수님은 경제학자이다. 그 책을 읽은 나는 문학평론가이다. 경제학자와 문학평론가로 선을 그어 갈라놓고 보면 둘 사이에 큰 접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간의 인연은 그러한 구분이 갈라 놓게 되는 선입견을 넘어 인연의 고리를 확장할 때가 많다. 안두순 교수님과 나의 인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유로 책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안두순 교수님과의 인연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안두순 교수님과의 인연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가 2026년이니까 45년전에 시작된 인연이다. 그때 나는 서울시립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이제 짐작이 가겠지만 안두순 교수님은 우리 학과의 교수님이었다. 유학에서 갓 돌아와 강단에 선 젊은 얼굴이었다. 지금도 동안이 여전하시지만 교수님의 얼굴은 그때는 더더욱 얼굴이 나이를 오래도록 잊고 사는 막강 동안이었다. 때문에 교수님과 우리가 뒤섞여 있으면 누가 학생이고 누가 교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가장 젊은 시절의 교수님 밑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대학 다닐 때 자주 문학을 힐끔 거렸던 나는 결국 문학의 길을 내 삶의 여정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 때의 나는 그래도 경제학과 학생이었다. 대학 다니는 동안 안두순 교수님은 우리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겨주신 분이다. 학생에게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실력있는 훌륭한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것이 학생의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 행복이 안두순 교수님 밑에서 경제학을 배운 우리들에게 있었다. 그 생각은 근래까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교수님의 에세이집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읽고 나선 또다른 행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학 작품을 읽을 때의 행복감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학이라는 학문 아래 가장 젊은 시절의 교수님과 함께 하며 행복했었는데 이번 행복은 문학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왔다. 문학의 얼굴로 온 교수님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어린 나이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책 속에서 성장하여 교수님을 만났을 때 막 대학에 입학했던 우리들의 나이에 이르고 있었다. 우리가 익숙했던 교수님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이전을 살아가고 있는 교수님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교수님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갓 들어간 가장 젊은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교수님을 만나는 이 특별한 시간은 경제학을 배울 때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행복감이 상실감을 동시에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 상실감은 오랜 기간 문학계가 교수님을 경제학계에 뺐기고 있었다는 생각에서 왔다. 그래도 문학의 이름으로 맛본 이번 행복감이 아주 커서 그런 상실감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교수님 덕분에 나는 두 가지의 행복을 맛본다. 대학 때는 경제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행복이 나에게 있었다. 지금은 좋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문학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다시 또 내 몫이 되었다. 그 두 가지의 행복을 안겨준 안두순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이제 본격적으로 책 얘기로 들어가 볼까 한다.

2. 안두순 교수님의 에세이집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나이가 이제는 앞을 내다보기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아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2~3년 전부터 기억의 그림자를 더듬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메모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글들은 내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메모해 두었던 단상들이 모인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첫구절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본다고 했고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이라고 했으니 과거의 얘기이다. 옛날 얘기인 셈이다. 때로 책속의 어떤 얘기가 점하고 있는 시대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아주 먼 옛날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우리가 과연 오늘만 사는 것일까를 되묻게 한다. 책속에 좋은 예가 있다. 그 대목을 읽어보면 이렇다.

가요무대에서 진성이 부른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그 한 줄 가사에 마음이 멈췄다. 가난에 지쳐도 자식 굶길까 애태우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보릿고개의 참상 -그때는 다 그랬단다」 중에서

노래가 흐른 것은 오늘이지만 그 노래를 듣는 교수님은 과거로 건너가 어머니를 만난다. 그에서 그치지 않고 “뛰어놀았던 기억”도 없고 “달릴 힘조차 없었”던 병약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우리는 한동안 오늘을 산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오늘과 과거를 동시에 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얘기들은 과거의 얘기가 아니다. 그 얘기들의 과거가 교수님에게선 오늘을 동시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수님에게선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과거의 얘기이다. 우리는 사실 일정 시점을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오늘과 과거를 동시에 살아간다.
문득 궁금해진다. 어떻게 흘러가버린 과거가 오늘을 함께 살게 된 것일까.
내가 그 실마리를 본 것은 찢어진 고무신에 관한 일화를 전하고 있는 한 글의 마지막 구절에서 였다. 글의 마지막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물으며 적어 놓고 있다.

이런 것도 추억이 되는 걸까. 아프고 낡았지만, 분명히 내 삶의 한 조각이었다.
—「검정 고무신 -찢어진 고무신도 하나의 추억이다」 중에서

나는 어떤 기억은 머릿 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새겨진다고 생각한다. 교수님이 “이런 것도 추억이 되는 걸까”를 물으면서도 그 기억을 버리지 않은 것은 그 기억이 몸에 새겨진 기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도 우리가 우리의 몸을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오늘을 살아갈 때 몸은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은 그렇게 우리의 몸에 새겨져 살아있는 동안 버릴 수 없는 우리의 몸 자체가 된다. 교수님은 “아프고 낡았지만, 분명히 내 삶의 한 조각이었다”고 글을 맺었지만 내게는 그 구절에서 읽은 “삶의 한 조각”이 내 몸의 일부라는 말로 읽혔다.
책에서 저자가 겪는 어린 시절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가난이다. 그 점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는 그 가난의 깊이가 심해처럼 깊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깊이의 가난이 아니라 바닥에 이른 가난이다. 바닥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가장 깊은 깊이를 갖는다. 내가 교수님의 가난에서 그런 심해의 깊이를 엿본 글은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에서 내준 고구마를 먹지 않고 돌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이었다. 인용해본다.

나는 남의 집에서 고구마 한 개를 얻어먹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이것이 내 어린 시절의 모습 중 하나였다. 배고픔보다 체면이 먼저였던 아이. 숫기는 없지만 그래도 자존심만은 버리지 않았던 아이. 나는 그런 아이였다.
—「또 다른 고구마 이야기 -배고픔보다 체면을 중시했던 철부지 소년」 중에서

나는 그때 교수님이 친구의 집에서 고구마를 먹지 못한 것이 교수님이 겪었던 가난이 심해처럼 깊어 눈앞에 있는 고구마까지 팔을 뻗기에는 그 거리가 아득하게 멀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심해는 깊이가 중첩되면서 쌓인 압력이 너무 높아 짧은 거리도 아득한 거리로 밀려난다. 교수님은 그때 고구마를 먹지 않았던 것을 체면과 자존심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나중에 교수님이 그 깊은 가난의 심해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는 부력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본다. 너무 깊은 심해에선 눈앞에 두고도 사실은 그것이 너무 멀어 손이 닿질 않는다. 그러나 부력을 가진 존재는 그 깊은 심해를 벗어나 바다 위로 떠오를 미래를 갖는다.
그 심해를 벗어나 가난의 바다를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정상적인 거리에 놓인다. 나는 그때의 예를 유학의 여정에 올라 독일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알고 지내다 독일로 귀국한 한 독일인 부부와 만난 얘기에서 엿볼 수 있었다.

현지 시간으로 늦은 오후에 도착한 나를 반갑게 맞아준 두 사람은 우선 나를 자신들의 침실로 안내했다. 피곤한 나를 위해 침실을 내주며 저녁 식사 전까지 잠시 눈을 붙이라고 해서 나는 사양하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드디어 독일 유학의 꿈을 이룬 순간 -독일의 대학 캠퍼스를 처음 밟던 날의 감회」 중에서

가난의 심해에선 사람들의 호의에 선뜻 마음을 내줄 수가 없다. 갖고 있는 모든 힘, 다시 말해 누가 호의로 내주는 눈앞의 먹을 것에 손을 뻗을 힘까지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그 심해를 벗어날 수 있는 부력에 보태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의 깊이가 크게 깊지 않은 곳에선 미안해 하면서도 호의를 어렵지 않게 마음에 담아갈 수 있다.
가난의 힘겨움은 사실 가난 자체보다 가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온다. 가난이 남기는 상처 또한 가난 자체보다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올 때가 많다. 「밤 줍기와 윤동아재의 싸늘했던 눈빛 -차별의 눈초리는 모멸감의 상처로 남았다」와 「조리 역할을 하던 깨어진 바가지 -깨어진 바가지에 베어있던 삶의 고단함」에서 그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두 글은 상처가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려준다. 상처는 가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차별하며 조롱하는 시선과 태도에서 온다. 쓰레기장 옆의 누추한 곳에 피어 있다고 꽃이 누추한 법은 없다. 어떤 누추도 꽃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의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다. 그가 서 있는 곳이 누추하거나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누추하면 사람마저 누추하게 보면서 멸시하고 차별한다. 그리고 그런 시선과 태도는 상처가 된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미리 알아본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란 얘기도 된다.
상처도 있었지만 그 가난 속에선 또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니, 온통 이 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상처의 아픔보다는 인간의 온기라고 해야 한다. 그 온기를 접할 수 있는 글 중 하나가 「기차길 석탄 줍기와 텃새, 그리고 삶의 온기 -치열한 경쟁보다 배려의 고마움이 생생하다」라는 글이다. 글은 석탄 줍기의 경쟁에서 밀려 넘어진 아이에게 화차 기관사가 퍼준 한 삽의 석탄이야기를 전한다. 교수님은 “그 따뜻한 한 삽의 석탄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불을 지펴주었다”고 적어놓고 있다. 한 삽의 석탄이 추위로부터 몸을 녹여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 삽의 석탄이 마음에 나누어준 온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식지 않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온기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책은 책을 읽는 것으로 우리가 그 온기를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3. 이제 얘기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내가 안두순 교수님과 맺은 인연은 대학 때 교수와 제자로 맺어진 인연이 끝이 아니었다. 나에겐 교수님과 갖게 된 아주 특별한 인연이 하나 더 있다. 교수님은 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신 분이다. 책을 읽고 났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때의 주례사였다.
그때 교수님은 경제재와 자유재를 언급했다. 경제재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모든 것들이다. 교수님은 경제재가 중요해 보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는 자유재라고 말씀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숨쉬는 대기이다. 돈을 주고 공기를 사서 마시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그 대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 교수님은 내 결혼식 때 경제적 교환가치는 없어도 서로가 서로의 호흡이 되어 숨을 쉬게 해주는 대기 같은 자유재가 되라 말씀하셨다. 아마 댓가를 생각지 않는 사랑도 그 자유재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대기로만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도 호흡을 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우리의 중요한 호흡이 된다. 가난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나 무책임한 아버지는 우리의 호흡을 막는다. 우리는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행상을 하며 힘겨운 삶을 마다 않는 어머니는 우리의 호흡이 된 존재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의 호흡이 되어 우리를 숨쉴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호흡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같이 숨 쉴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에 있었던 구절 하나를 들여다 보기로 한다.

이 책은 나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풀어나간 에피소드들의 모음이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이겨낸 삶을 말하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 하늘을, 어둠에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준 많은 이들의 도움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 늘 감사의 마음을 놓지 않겠다.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준 도움에 못지 않게 교수님이 스스로 기울인 노력 또한 엄청나게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는 그 노력을 앞에 내세워 자신을 부각시키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질 않다. 선생님의 노력은 크게 남기지 않고 받은 도움만 양각으로 선명하게 새겨놓고 있다. 내게는 이것이 하나의 제안처럼 보였다. 바로 우리 모두가 타인에게 있어 관계의 호흡이 될 수 있는 대기처럼 살자는 제안이다.
교수님은 경제학 교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제적 가치를 쫓아가기 보다 모두가 호흡하며 숨쉴 수 있는 대기가 되자고 한다. 진정 그를 오늘에 살아있게 해준 그 호흡의 순간들이 책속에 빼곡하다.

***동백나무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네이버스토어의 동백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다.
https://smartstore.naver.com/dongbaeknamoo/products/13527647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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