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까지의 산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입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이었지만
그 길에서 나보다 먼저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사람을 여럿 만났습니다.
눈이 많이 왔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며
그 잦은 발길로 길을 넓게 열어놓아 산을 오르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1월 15일에 올랐던 그 비로봉까지의 길을
오늘은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거쳐 북대사 갈림길까지 이어갑니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높이가 계속 확보되니 아무래도 걷는 길에 눈이 시원합니다.
남쪽으로 바라보니 멀리 아래쪽에서
산 허리를 돌며 길 하나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저게 무슨 길인가 싶습니다.
알고봤더니 나중에 내가 내려갈 길이었습니다.
언젠가 차로 저 길을 가보겠다고
길이 시작되는 구룡령 고개밑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출입 통제 기간이라 헛물을 켜고 돌아선 적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표지판을 만나 잠시 갈등을 겪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가는게 쉽지 않은데다
상왕봉과 북대사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사람은 딱 한 사람 만났습니다.
내 등뒤에서 나타나더니 나를 앞질러 갔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야 있을까 싶습니다.
설악산에 올랐다 내려온 뒤로,
사실 설악산만 아니면 모든 산이 만만하게 보이는 점이 있긴 합니다.
결국 계속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봄에 다시 온다면
저 자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파랗게 물이 오른 나뭇잎과 꽃이 나를 반겨주겠지요.
눈밭에서 내밀고 있던 고개를 기억해 두었다가
봄에 와서 다시 인사나누고 싶습니다.
눈이 오면 산세의 윤곽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양화는 아마도 그 윤곽을 중시는 그림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눈온 날,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건 서양화풍이 아니라 동양화풍으로 느껴지거든요.
하긴 동양화에서 중시하는 여백은 색으로 보면 눈과 다름없는 흰색입니다.
그러고 보면 눈은 세상으로 와서 여백을 만드는 셈입니다.
빡빡하게 들어찬 세상으로 와서 하얀 여백의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여백으로 비워놓으면 세상이 더 멋진 그림이 된다고 알려주는게
바로 내가 겨울만 되면 그렇게 찾아가고 싶어하는 눈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왕봉으로 가는 길에
눈이 하얀 여백으로 비워놓은 세상 앞에서
자주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비로봉 쪽을 바라보니
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나무들이
모두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눈시린 풍경입니다.
가까이 가서 찍고 싶었지만
눈길이 호락호락하질 않습니다.
멀리서 눈으로 만족하고 맙니다.
오대산 주목들은 그 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촘촘한 가지 사이로 어떻게 내려갔는지
눈이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여백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주목은 눈이 만들어준 여백을 가지 사이로 끼고는
지나던 내가 고개를 꺾어
한참 동안 시선을 올려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원래 눈이 오면 눈밭에 발자국을 내면서 가는 재미가 아주 큰 법인데
눈도 워낙 많이 오니 발자국을 낼 수가 없습니다.
한번 디디면 발자국이 아니라 눈구덩이가 파입니다.
발이 한번 들어갔다 나온 자리엔 쾡하니 구덩이가 뚫렸습니다.
그래도 구덩이 속까지 하얀 눈입니다.
상왕봉의 바로 코앞까지 왔습니다.
이상하죠.
아래서 보면 아득해 보이는 봉우리도
일단 올라오면 그 위용을 버리고
그냥 뒷동산의 작은 봉우리처럼 아담해 집니다.
산은 멀리서 볼 때와 그 품에 안겼을 때가 많이 다릅니다.
봉우리의 품은 안기긴 힘들지만
일단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 안기면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대개는 아늑합니다.
상왕봉에 도착했습니다.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1563m이고,
상왕봉의 높이는 1491m라고 합니다.
72m 가량 내려왔군요.
돌아보니 멀리 비로봉이 보입니다.
가운데의 가장 높은 봉이 비로봉입니다.
핸드폰 통화도 되더군요.
비로봉 사람과 상왕봉의 사람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손을 흔듭니다.
원래는 목청을 아무리 높여도 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거리인데
세상이 좋아져서 목청 높이지 않고도 소리로 서로 왔다갔다 합니다.
봉우리와 봉우리에 서서 서로 눈빛도 주고 받습니다.
아, 눈빛은 아닌가요.
그렇군요. 몸짓을 주고받는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왕봉에서 바라본 북쪽 풍경입니다.
왼쪽으로 보면 산의 허리를 자르고 지나가는 길이 하나 보입니다.
바로 구룡령입니다.
구룡령은 저렇게 산을 너머 간 뒤 동해쪽의 산자락 아래서 한계령과 만납니다.
한계령과 만난 구룡령은 사이좋게 하나가 되어 양양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구룡령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고개를 넘어가는 내내
차를 한대도 만날 수 없는 그 한가함이 좋았습니다.
구룡령 아래쪽에선 이곳의 상원사까지 연결되는 도로가 하나 있습니다.
446번 지방도인데 거의 일년내내 폐쇄되어 있습니다.
물론 비포장 도로입니다.
아예 폐쇄를 하고 사람만 다니게 하는게 나을 듯 한데
1년에 서너 달은 또 차량이 다닐 수 있게 해줍니다.
백담사 들어가는 길도 그렇고,
이런 길은 차좀 다니지 않았으면 싶지만
관광객들 쳐다보며 사는 사람들 입장은 또 그런게 아닌가 봅니다.
세상일이란게 모두에게 좋게 풀어가기는 참 어렵습니다.
구룡령에선 항상 차를 세워놓고 남쪽의 산들을 한참 바라보다 가곤 했는데
바로 그때 구룡령에서 바라보던 산이 지금의 이 자리였습니다.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구룡령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바로 오대산이란 것을.
흰 눈밭을 기어가는 작은 벌레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 눈밭에 뭘 구하러 나왔나 싶습니다.
아직 겨울이라 새들 이외엔 움직이는 것들을 거의 보기 힘든데
어쩌다 잠이 깨어 눈밭에서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살길을 잘 찾았으면 싶군요.
상왕봉에서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상원사 주차장으로 가는 넓은 길을 만나게 되고,
계속 능선을 타고 가면 작은 봉을 하나 넘어 두로령으로 가게 됩니다.
두로령에선 두로봉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쪽 방향으로는 사람 발자국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산타는 사람들은 눈이 온 산에 길을 내놓는 것을 러셀이라 부른답니다.
그러니까 전문 용어를 좀 쓰자면 두로령 방향으로는 러셀이 나있질 않았습니다.
눈덮인 산은 원래의 길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결국 눈길이 나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앞서간 사람이 헤쳐놓은 눈길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하얗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4 thoughts on “강원도 오대산 가는 길 3 – 비로봉에서 북대사 갈림길까지”
오대산 설경 구경 실컷 했습니다.
부산에서 강원도는 너무 멀어요. ㅡㅡ;;
동워니님, 참 부럽습니다.^^ 그 부지런함이요~
부지런함이야 어떻게 플라치도님을 따르겠어요.
항상 그늘진 곳으로 체온을 나누러 다니시는 플라치도님을 생각하면 늘 부끄럽기만 한 걸요.
오대산 눈풍경이 잠시 눈요기라도 되었으면 좋겠네요.
찾아주신 것 감사드려요.
다리 긴 그 벌레가 참 마음에 걸리는군요..-_-;;
착한 바둑이님.
길을 잘 찾아갔을 거라고 생각해야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