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의 자리에서 모두가 함께 나눌 자유를 꿈꾸고 부추기다 –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속지

1

나에겐 딸이 하나 있다. 중학교 3학년이다. 대부분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도 핸드폰을 손에 잡으면 손가락을 잰 동작으로 놀리며 문자로 소통을 한다. 아마도 아이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을 사용하는 전통적 방식의 소통을 하는 경우는 나와 통화할 때 이외에는 드문 것 같다. 가끔 아이가 핸드폰의 문자를 누를 때,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 빠른 손놀림은 눈이 쫓아가기에도 바쁠 정도여서, 저게, 정말 제대로 누르고 있는 것일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항상 더듬거리며 자판의 문자를 찾기에 바쁜 나의 손가락을 생각하면 아이들의 문자 소통은 거의 경이에 가깝다.
그 움직임을 쫓는 나의 눈길이 어지러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아이들이, 핸드폰의 자판을 눌러 의사를 소통하고 있을 때면, 그 현란한 자유로움 때문에, 문득문득, 나는 내가 혹시 말에 구속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실제로 나는 입에 무엇인가를 물면 그때부터 통화는 불가능해 지지만 아이는 무엇을 먹으면서도 얼마든지 소통을 한다. 아이의 소통은 말의 소통이 아니어서 나의 경우와 달리 입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 아이는 손이 자유로우면 입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의사 소통의 자유를 누린다. 그때면 더더욱 나는 내가 누려온 말을 통한 소통으로부터 소통의 자유가 아니라 소통의 속박을 느낀다.

2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를 펼치고 그의 시를 읽어가기 시작한 순간, 나는 시집을 매개체로 삼아 시인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얘기는 그의 시가 현대적 감각으로 무장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시가 말의 구속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난 문자의 자유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는 언어의 구속을 뿌리치면서 언어의 자유 지대에 서 있었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를 묻고 있던 언어가, 일상 속에서 아무런 구속의 느낌없이 자유롭게 쓰고 있던 우리의 언어가, 실제로는 우리를 구속하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일단 그 구속의 현장을 몸소 체험해보기 위하여 조금 도시의 외곽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호수와 나무가 있는 풍경을 찾아낸 뒤, 그 풍경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그 호숫가에는 한 사내가 앉아 낚시를 하고 있다. 호수는 잔잔하다. 낚싯대에 고기가 걸리고, 사내는 고기를 낚아 어망에 집어 넣는다. 고기가 끌려오면서 잔물결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잔잔한 수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사내의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하늘로 높이 솟아있다. 나무는 호수의 수면에 그 모습을 비추고 있다.
아마도 호수와 나무의 풍경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펼쳐놓은 나의 언어에 대하여 구속의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언어는 자연스러우며, 그 자연스러움은 낯이 익다. 그 낯익음은 편안하며, 그 편안함 속에 구속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오규원의 「호수와 나무」 속으로 발을 디딘 순간, 그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 언어로 펼쳐놓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호수와 나무」 전문

내가 일상 언어의 구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호수는 고기를 낚아올릴 때 잠시 잔문결을 일으키다 다시 잔잔해 졌으나, 그 일상의 구속을 벗어났을 때,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한 사내”의 기다림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일상 언어의 구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풍경 속에선 나무가 호수에 비친 것이었으나, 그 일상의 구속을 벗어났을 때, 그것은 ‘높이’만을 갖던 나무가 ‘깊이’를 얻고 있는 풍경이 되었다.
내가 우리의 일상적 언어를 구속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거의 그 언어를 벗어나질 못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람들이 그 언어를 벗어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구속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구속되어 있는 사람이 그 구속을 자각하지 못할 때처럼 위험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며, 그 답답함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그 답답함 앞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구속의 세상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 구속의 세상을 자각하지 못하면 저항도 없다. 오규원의 시는 그런 측면에서 그 일상 언어의 구속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이루며, 그 얘기는 곧 그의 시가 사실은 궁극적으로 저항의 언어라는 뜻이다. 과연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저항이 있을 수 있을까?
일상에 깃든 언어의 구속을 체험하고 싶다면 그냥 그의 시집을 펼치고, 그의 언어와 대면하면 된다. 그의 시가 어떤 풍경을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시에서 언어의 구속을 뿌리친 자유를 보면서, 그 대척점의 우리들 일상에선 구속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한 예는 그의 시집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한적한 시골길로 나서보자. 도로 양쪽으로는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차는 한대도 다니지 않고 있다. 바람마저 잠잠하여 도로에는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이 풍경 앞에서 우리를 묶고 놓아주지 않는 이러한 언어의 구속은 오규원에게선 극적으로 반전이 된다.

도로의 양쪽에는 가로수들이 함께 달리며
한 구역씩 맡아 하늘을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가고 사람도 어디로 가고
도로에는 지금 질주하는 도로만 가득합니다
-「도로와 하늘」 부분

놀랍기 그지 없지 않은가. 구속된 언어에 묶여 있을 때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던 도로가 자유의 언어를 얻자 엄청난 운동감을 보여주며 질주하고 있다. 아마도 한적한 시골길을 유유자적 걸으며 그 조용한 평화를 만끽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오규원의 시집을 꺼내들고 이 시를 읽었을 때 질주하는 길의 운동감으로 인하여 몸이 휘청거렸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어느새’ 길에 쓰러진 자신을 발견한 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이 쓰러진 연유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여, 발밑의 길을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저녁 시간대로 걸음을 옮겨보자.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고, 해는 지금 나무에 걸쳐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천천히 이동을 하며, 서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해가 그렇게 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그 일상의 언어로 치장된 석양의 시간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면 오규원의 시로 걸음을 해보자.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에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고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서산과 해」 전문

일상 언어에 구속되어 있을 때, 나의 시선은 지는 해에 맞추어지며, 그 움직임은 더디고 느리고 때문에 거의 서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나무는 더더욱 움직임이 없다. 나무는 그저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구속을 뿌리친 곳이 있다. 바로 오규원이 구축하는 시의 공간이다. 그곳에선 나무들이 팔을 뻗어 해를 서산으로 옮긴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산단풍나무가 해를 다시 고욤나무에게로 집어 던지지나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시달렸다.

3

예전에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광고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침대가 단순한 장식적 물건이 아니라 편안한 잠을 위한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란 사실을 말하기 위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오규원의 시를 읽는 나의 뇌리 속에선 시는 새롭고 기발한 표현이 아니라 과학이란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때의 과학이란 시가 어떤 과학적 연구의 성과물이란 얘기가 아니라 과학이 세상을 드러내는 방법론과 오규원이 그려내는 세상의 지형도가 매우 흡사하게 닮아있다는 얘기이다.
오규원의 시는 사과가 떨어진다는 언어보다는 지상의 중력이 사과를 잡아당긴다는 언어에 더 가까우며, 오규원의 시는 해가 뜬다는 언어보다는 지구가 돈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어떻게 일상 언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풍경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언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사과를 아래쪽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이라는 이름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 힘을 볼 수 있을 때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한다. 그 새로운 세계는 그 간에 우리를 묶고 있던 일상적 틀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살필 수 있도록 해준다. 그간의 우리 시선이 사과에 고착되어 있었던 반면 새로운 시각은 사과와 지상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작용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망 속에서 중력이라는 말을 빌어 사과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설명한다. 해가 뜨거나 질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우리의 시선은 해의 움직임에 맞추어진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시선을 태양에 두면서도 동시에 지상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지구의 자전이란 움직임을 감지하는 순간, 해가 뜨고 지는 일은 지구와의 사이에서 그 역학 관계가 설명된다.
오규원은 우리들에게 눈앞에 분명하게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돌 하나를 집어 들”고 그것을 공중으로 던졌을 때, 그는 돌의 날개를 본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이와 망초」 부분

“아이가 몇 걸음 가다/돌을 길가에 버렸”을 때, 이번에는 돌의 발이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아이와 망초」 부분

우리의 눈에 뜰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내가 들어올 때, 시인은 그곳의 허공과 침묵을 본다.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하늘과 침묵」 전문

그렇다면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혹자는 곧바로 시인의 역량이나 자질이 떠오를 것이다. 아마도 타고난 재능이 그 힘의 원천이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그 힘의 원천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자유는 곧 저항의 다른 이름이다. 구속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자유의 힘이다. 결국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규원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게 강한 시인이며, 그 갈망이 자유의 힘을 키우고, 그 힘이 그로 하여금 일상에 저항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저항의 결과물이 그의 시인 셈이다.
오규원을 염두에 두고, 시의 언어를 구속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그때부터 일제 강점기과 군사 독재 시절에 지배 정권에 아부했던 시인들의 시가 과연 시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과의 반목은, 그들의 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반목을 쉽게 풀기 어려워 보인다.
나는 종종 오규원의 시를 읽을 때면 김남주를 떠올린다. 나는 두 시인이 같은 길을 달리 걸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김남주가 걸어갔던 시를 통한 저항이 물리적 실체로서의 군사 정권에 그 표적을 두고 있었다면, 오규원의 시가 그 표적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일상적 언어의 구속과 억압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규원의 저항이 더더욱 근원적이다. 그리고 자유의 힘으로 일상에 맞서는 그의 저항 앞에서 세상은 일상적 언어가 가리고 은폐했던 풍경을 벗기에 이른다. 그가 은폐된 세상의 베일을 벗길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언어가 해방된 세상이며, 그때 우리는 그 세상에서 언어의 해방을 맛보는 한편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언어의 구속을 실감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언어는 해방의 언어를 보여주면서 구속을 일깨운다.
오규원은 그러한 해방된 언어의 세상으로 걸음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들에게 사이에 주목해 보라고 말한다. 사이에 주목하라는 것은 그동안 우리들이 시선을 맞추고 있던 초점의 부위를 옮겨보라는 조언에 다름 아니다. 가령 붉은 양철 지붕에 반쯤 빠져있는 못이 있다고 해보자. 그 곁에는 아직 처음의 상태 그대로 박혀 있는 못이 있다. 그 둘 각각에 초점을 맞추면 그 둘은 각각의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있게 된다. 이 경우 오규원은 두 못의 초점을 빠져있다에 맞춘다. 그 순간 두 못의 사이에는 하나가 먼저 앞서고, 이어 또 하나가 그 뒤를 따르는 동선이 구축된다.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양철 지붕과 봄비」 전문

그 동선은 한번 시작되면 양철 지붕 위의 모든 것 사이로 퍼져나가며 번진다. 그가 그렇게 드러내는 사이의 시들은 마치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과 나 사이 강의 물과 내 몸의 물 사이 멈추지 못하는 강의 물과 흐르지 못하는 강의 둑 사이(하략)
-「강과 나」 부분

그러나 이러한 시들은 우리들에게 저항을 우리들이 직접 몸으로 옮겨볼 수 있는 또다른 여지를 마련한다. 그것은 시를 읽어보는 차원을 넘어, 시를 직접 체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방법론을 그대로 좇아 집안의 화분이나 들녘의 꽃과 나 사이에서, 그동안 잠자거나 묻혀있던 대상들을 자유의 힘으로 일으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에겐 마치 의미없이 대상을 되풀이하고 있는 듯한 이러한 시들이 더욱 소중하게 보인다.

이도준의 밭에서 서기범의 밭에서 유한수와 김진채와 도건석과 민병성의 밭에서(하략)
-「그림과 나 1」 부분

논과 밭을 지날 때 우리는 그 주인을 모른다. 우리가 그 주인을 모를 때, 그 공간의 주인은 논과 밭이라는 말 속에 묻혀버린다. 오규원은 논과 밭이란 그 말 속에 매몰되버린 그 공간의 주인을 일일이 복원시킨다. 이 정도면 고향에 내려갔을 때 내가 얼마든지 그 이름을 일일이 물어 단순히 시를 읽는 정도가 아니라 시를 체현하는 경험으로 옮겨볼 수 있다.

김종택의 집을 지나 이순식의 집과 정진수의 집을 지나 박일의 집 담을 지나 이말청의 집 담장과 심호대의 집 담장을 지나(하략)
-「사람과 집」 부분

이번 경우에는 굳이 고향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 그냥 동네를 한바퀴 돌며 집집의 문패를 눈여겨 보는 수고만 곁들이면 집과 거리라는 말 속에 묻혀버린 그 길의 주인들을 복원시킬 수 있다.

망설이지 않고 신발을 신자마자 성큼 성큼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정성수는 가고, 망설이지 않고 앞서 가는 남편 정성수를 따라 급히 신발을 찾아 신고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이남경은 가고, 떠날 준비를 마친 유방숙은 남편 김찬제가 신발을 신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팔짱을 끼고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나란히 가고,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조동기는 느릿 느릿 신발을 신은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현관 앞 타일 바딕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고 잠깐 서서 하늘 한번 쳐다보고 가고(하략)
-「타일과 달빛」 부분

이번에는 굳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도 없다. 집안에서 다녀가는 손님들의 이름을 챙기고 그들이 돌아갈 때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들이 다녀갔다는 일상 언어 속에 뭉뚱그릴 때 모두 그 속으로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복원시킬 수 있다. 그 복원은 시를 체현하는 공간이며, 말을 바꾸면 일상 언어에 대한 저항의 경험 공간이 된다. 오규원은 상당수의 시에서 우리들이 원용할 수 있는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4

나는 오규원이 말하는 날 이미지를 일상적 경험에 윤색되지 않은 시원의 상태로 돌아가 처음처럼 세상을 목도하고, 그리하여 일상 언어의 구속을 뿌리치고 자유를 얻은 자가 포착해낸 그 세상에 대한 시원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 날 이미지의 세계에 서는 순간, 행복하게도 잠깐이지만 이제 나도 일상의 구속을 뿌리칠 수 있다. 그의 시가 이제 시의 체현이라는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으며, 그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시의 길을 걸어 일상 언어의 구속을 뿌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모두가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닦은 셈이다. 오늘, 그의 시로 걸음한 나의 여정은 알고 보면 자유의 호흡에 다름 아니었다. 여전히 닫힌 일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이제 그 자유의 호흡으로 인하여 나는 한동안 구속된 일상의 삶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기회가 될 때마다 세상의 구속과 억압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자유란 소중한 것이다.
(『현대시학』, 2005년 9월호)

17 thoughts on “시원의 자리에서 모두가 함께 나눌 자유를 꿈꾸고 부추기다 –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1.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은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는데 조사하면 다 나오네요. 너무 홀짝거리지는 마세요. 홀짝의 달인이 되시면 아이들이 홀짝하자고 하면 술과 안주를 꺼낼지도 모르니까요.ㅋㅋㅋ

  2. 그림이나 시 같은 작품들을 보면 그냥 좋구나, 별로네, 패쓰로만 다가오는데
    해설을 보면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하는 걸 느낍니다.
    뭔가 느꼈는데 표현할 줄 모르는 답답함을 걷어내 주곤 합니다.
    그러다 뒤돌아서면 다시 좋구나, 별로네, 패쓰…한답니다.

    오규원 시인은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했으면 아주 뛰어난 분이 됐겠네요.
    중력과 지구 자전에 대한 아주 멋있는 논문을 쓰셨겠어요.
    시인이나 과학자들은 비슷한 눈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보통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글로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1. 딱 한번 직접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혹시 상대성이론을 공부하신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죠.
      그랬더니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시의 시각은 양자역학이론을 많이 닮았다고 했더니 그런 얘기를 들은 듯도 하다고 하시더군요.
      법대 출신이신데 법보다는 법조문을 구성하고 있는 말의 특성을 많이 생각하셨더라구요.
      저는 경제학과 출신인데 경제학 자체보다 그 학문의 방법론에서 영향을 무지 많이 받았거든요.
      고개가 끄덕여 지더군요.

  3. 그제던가 동아일보읽다가 오늘이 오규원시인님 기일이라는걸 알았어요.
    추모제에 김동원님이랑 포레스트님도 가시겠구나..했죠. 잘 다녀오세요.

    1. 동원님만 방금 전에 나가셨답니다.
      저는 안갔지요.
      문학인들 모임일텐데 뒷풀이 있으면 제가 따라다니게 불편할 것 같아서요.
      저는 유고집이나 받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구요.^^

    2. 저도 추모제만 보고 왔답니다.
      제가 아는 시인들은 많은데 시인들은 절 몰라서 어울리기도 뭣하고 그래서…
      너무 오래간만에 갔더니 얼굴을 잘 몰라보기도 하고…
      준비를 많이 했더군요.
      한잎의 여자도 보았죠. 한눈에 알아보겠더군요.

    3. 한잎의 여자가 실존 인물이었군요.
      어떤 여자일까 무지 궁금하네요.
      저녁6시쯤 가족모두 찜질방갔다가 방금 왔어요.
      추모제 궁금해서 잠깐 컴터 켰답니다.
      편히 주무세요.^^

    4. 그거야 뭐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냥 제 느낌이 그랬어요.
      한잎의 여자의 여자가 언어라는 말도 있지만
      난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은 잘 믿지 않고 있어요.
      말이 사람의 몸을 앞서가는 경우는 저는 못봤어요.

  4. 이 블로그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오규원 시인의 수목장이 치뤄지던 작년 이즈음,
    무엇엔가 홀린 듯 수원에서 전등사를 한숨에 달려갔었습니다.

    어제는 예정 없이 무심코 그 산사에 들러 참배하고
    고인이 잠든 그 소나무 옆길을 돌아 오면서
    1주기가 되지 않았을까 했었는데 …

    전등사에서 5키로 정도 떨어진 마니산 정수사까지 걸어서 다녀왔답니다. 아름다운 절 정수사였습니다.

    1. 전등사를 동문이나 남문이 아니라 서문이나 북문쪽으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사람의 발길을 버리고 선생님을 찾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쪽은 길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돌아보니 길은 분명히 있었지만요.
      언제 한번 오래 걸어 선생님께 가봐야 겠어요.

  5. 이렇게 긴 글을, 그것도 시에 관한 글을 한달음에 읽어본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으니 당장 오규원님의 시집을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숲과 나무 두 분께서 오규원님 얘기가 나올 때마나 남다른 존경과 애정을 표하시는지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요.

    오규원님이 그 분 안에 있은 근원적 자유로 언어에 부여하는 이 탁월함은 동원님께서 다르지 않게 갖고 계신 능력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사과가 떨어지기 보다는 중력이 잡아당긴다는 언어는 오규원님의 것인지 동원님의 것인지 헷갈린다니까요.
    게다가 동원님 글에서 고유하게 빛나는 건 ‘산단풍나무가 해를 다시 고욤나무에게로 집어 던지지나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 이지요.^^

    어렸을 적에 김남주 시를 읽으면서 보이는 세계도 보지 못하던 어두운 눈이 열렸다면,
    오규원님의 시에서는 오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조금이나마 뜨게 되었네요.

    좀 여유있는 토요일 오전에 너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덧) 질문있습니다! 선생님!
    첫 번째 시가 <호수와 나무> 전문인디….
    두 번째 시는 <호수와 나무>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시의 부분인가여?^^

    1. 아이쿠, 시 제목을 잘못 적었어요.
      고쳤습니다.
      고마워요. 읽어주고, 교정도 봐주고…
      오늘은 오규원 선생님 추모 행사가 있어서 거기 갔다 오려구요.
      유고 시집이 나왔다는데 한권 받아가지고 와야겠어요.
      오래 간만에 보고 싶은 시인들도 좀 보고…

  6. 따님의 그 현란한 손놀림의 1/2는 delete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1人…ㅋ
    참으로 회화적인 시군만요~
    근데 너무 길어서 중간까지 읽었어요…ㄷㄷㄷ
    내일 나머지 읽어볼께요~ㅠㅠ;;
    이름만 시인인 바둑이…-_-;;

    1. 중간까지 읽은 것도 많이 읽으신 거예요.
      근데 영랑은 남자 시인이었잖아요.
      봄이 오고 모란이 피면 항상 생각나는 바둑이님.ㅋㅋ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