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내게 있어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
그건 내게 이 도시가 불모의 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불모의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불모의 땅에선 회색빛 건물들이 주인이고,
건물의 사이사이로, 혹은 길거리로 자리잡은 녹빛 생명체들은 이 도시의 객이다.
도시는 헐고 새로 짓고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자연에서 한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고
또 새로 태어나는 순환과는 전혀 다른 변화라는 것을.
나는 이 도시의 어디에서나 우람한 뼈대를 그대로 드러낸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수많은 건물들을 지나치곤 하지만
한번도 그렇게 자라는 도시의 건물에게서 생명체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생명체는 이 불모의 땅에선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건물들은 이 불모의 땅에서도 잘 자라고,
일단 다 자라고 나면 굳건하게 이곳을 버텨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굳은 건물들 속에서 산다.
이 도시에도 곳곳에 녹빛 생명체들이 있지만
나는 그 생명체들이 이 도시에서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다기 보다
오래 전에 생명을 놓아버린 이 도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긴급 수혈된,
그 긴급 수혈을 위해 도시로 강제 이주시킨 자연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생명잃은 도시에서
객으로 끼어든 자연의 생명으로 도시에서의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시골에서 20여년을 자랐다.
그곳의 풍경은 도시와는 정반대이다.
문을 열면 온통 식물성의 생명체로 가득차 있는 곳이 그곳이었다.
한여름엔 밤이 오면 풀벌레 소리가 집 주변으로 자욱하게 깔리는 곳,
그 소리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아니라 풀들의 야상곡(夜想曲)으로 들리는 곳,
달빛이 내리면 그 빛이 하얀 실처럼 풀려나가며 얘기가 되는 곳,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도시를 벗어나 꽃과 자연이 주인으로 있는 시골로 나가면
그곳에선 바위도 체온을 갖고 나를 그 품에 안아주며
나에게 두런두런 얘기를 풀어놓는다.
나는 그곳에서 꽃에 빠지고, 나무에 빠지며, 심지어 바위에 빠져든다.
아무 것도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가면 말을 나눈다.
그 때문일까.
나는 도시의 것들과는 대화에 서툴다.
도시에선 난 거의 무엇에도 빠져들지 못한다.
나는 도시 속에 살면서도 모든 것을 겉돈다.
그 도시에 그녀가 있고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도시에서 자랐고, 그러니 도시가 몸에 배었을 듯 싶다.
그러나 그 짐작은 빗나간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느낌은 식물성이다.
만날 때마다 나는 말을 많이 하고 그녀도 무슨 말인가를 한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생각해보면 산을 오르며 꽃과 나무를 지나치듯, 그녀를 스친다.
그러니 느낌으로 보면 그녀는 내게 식물성이다.
도시는 경이로운 곳이다.
도시는 불모의 땅이지만 그곳에서 자란 여자가 종종
도시의 여자가 아니라 식물성의 여자가 된다.
제 스스로 식물성의 여자가 되어
도시가 잃어버린 생명을 수혈하고
사랑의 말을 잉태한다.
도시에 식물성의 그녀가 있다.
9 thoughts on “식물성의 그녀”
강인한 생명력의 식물성이 느껴집니다.
하하, 그런 가요?
매력도 있죠.
사랑하면 도시에서도 살 수 있어요.
도시가 앗아간 생기를 사랑이 채워줄 거예요.
그녀를 위해 생선의 가시를 발라줘가며… 그 놀라운 생명력을 이어 가시구랴(생선 가시 얘기는 어느 블로그 지나가다 댓글에 적어놓은 글귀를 봤어요).
저분은 몇번 김동원님 사진에서 뵌 분인데 도시적일거라 생각했어요.
식물성인 그녀는 편안한 고향같은 의미인가요?^^
상당히 도시적이죠.
일단 패션 감각이 보통이 아니예요.
식물성이란 편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고향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구요.
저의 경우엔 도시에선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거나 상당히 도시 풍경에 대해 비판적이 되어 버려요. 빌딩, 지하철 등등의 풍경에 대해 시선이 싸늘해진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 싸늘한 시선에 놀라 사진을 찍어놓고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산이나 들로 나가 나무나 꽃과 시선을 맞대면 그런 시선은 간데 없고 말없는 그 세상과 웃고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그리고 작은 잎 하나에서도 발견이 이루어져요. 그 순간 식물성의 세계는 정말 많은 이야기의 샘을 이루죠. 놀라운 것은 도시에서도 그런 시선을 갖고 사진을 찍을 때가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식물성의 여자라고 명명하게 되었죠.
본지 한참 되었네요.
이스트맨님이 그리신 도시를 느끼자니 너무 삭막한 곳이네요.
그래도 전 도시가 좋아요!
전원을 동경할 수 있게 해주잖아요.
도시에 살기에 시골은 촌이 아니라 전원이고 자연이라 여기게 됩니다.
활력과 문화가 있는 도시에 삶이 평온함과 자연이 있는 귀향을 꿈꾸게 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는 이상하게 사진이 잘 안돼요.
산이나 들에 갔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사진을 찍게 되는데 이상하게 서울 한복판으로 나가면 어디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잘 판단이 서질 않더라구요. 아마 그래서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진이 잘 뿌리를 내리질 못하니까.
그래도 사진찍으러 산과 들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서울이 따뜻하게 느껴지곤 해요. 집있고, 사는 곳이라고…
전혜린의 아스팔트킨트의 아이~~~
아스팔트만 보며 자란 아이를 말한다고…
젊은 날에 읽은 기억이 나네요…맞는지요
삭막하게 도시에서 살아 왔지만
식물성의 여자가 되어 남들에게 향기로울 수 있다면요
아직 작은 들꽃을 노래 부를 수 있다면요
아스팔트 보다는 흙의 냄새를 맡고 싶지요
오늘은 된장을 담을까 해요
음식도 동물성에서 채식으로 바꾸어야 할까봐요~ㅋ
도시의 식물성 여자…멋지면서도 어떤 향수를 자극 하네요^^
도시에선 사람이 나무고 꽃이 되는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