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지 – 남한산성 산자락에서 만난 꽃들 4

꽃은 대게 내게 있어
이름보다는 그 얼굴이 먼저 였다.
이름없이 얼굴만 스치는 인연은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내겐 그렇질 않았다.
나는 꽃의 얼굴을 마주하면 항상 꽃의 사진을 찍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식물도감이나 인터넷의 야생화 사이트를 뒤적거리다
그 꽃의 이름을 뒤늦게 알게 되곤 했다.
그러나 꽃을 보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온 꽃이 있다.
바로 얼레지이다.
시인 박남준은 그의 시 「그 곱던 얼레지꽃」에서
얼레지를 가리켜 “다 보여 주겠다는 듯, 어디 한번 내 속을 아예 들여다보라는 듯/낱낱의 꽃잎을 한껏 뒤로 젖혀 열어 보이는 꽃”이며, “꽃잎을 치마처럼 뒤집어 쓰고 피어나는 꽃”이라고 했다.
그렇게 박남준의 시를 통하여 얼레지는 그 이름으로 먼저 내게 왔다.
나는 이름은 알고 있지만 얼굴은 한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 그 꽃을
이틀 동안 남한산성에서 무수하게 마주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얼레지는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저 땅만 내려다 볼 뿐.
왜 그렇게 수줍음을 타는지 그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그 자태만으로도 눈을 끌기에 충분한 미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를 의지삼아 얼굴을 들어볼만도 하건만
둘이 나란히 서 있을 때도 얼레지의 부끄러움은 여전했다.

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앞을 보여주지 않으니
뒷모습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다.
머리결을 펼쳐든 뒷모습, 참 곱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또다른 뒷모습.
쪽진 머리이다.
느낌이 단아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오호,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엷게 얼굴의 표정이 비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잠시 허리를 뒤로 젖히는 순간,
드디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한번 보면 반하여 마음을 거두기 어려울까봐
아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이틀 동안,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단 두 번.
얼레지는 만났다고 다 눈을 맞출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6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얼레지란 꽃이름에서
혹시 엘레지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엘레지가 슬픔의 노래를 뜻하니 사실 분위기는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얼레지는 그 이름을 꽃과 잎의 무늬에서 얻었다고 한다.
꽃을 보면 얼굴에 예쁜 무늬가 있고,
잎도 초록이 곱게 입혀진 다른 잎들과 달리 예비군 옷처럼 얼룩덜룩하다.
얼룩얼룩한 꽃이 얼레지인 셈이다.
나는 그 예쁜 얼굴 화장을 보고 누가 놀렸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레리 꼴레리하고.
그래서 더욱 아래쪽만 바라보며 얼굴을 숙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남한산성 남쪽 옹성 밖 군락지에서

달리 불리는 이름으로는 ‘가재무릇’이 있다고 한다.
뒤로 세운 꽃잎을 가재의 집게로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무릇은 백합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꽃이다.
얼레지의 영어 명칭도 ‘가재무릇’과 비슷해 보인다.
‘개이빨 제비꽃’(dog’s tooth violet)이기 때문이다.
뒤로 세운 꽃잎에서 으르렁대며 드러낸 개이빨을 본 것일까.
어쨋거나 그런 이름은 꽃의 분위기를 확 깨버린다.
나는 물론 흔들림없이 얼레지로 부를 작정이다.

원래 박남준 시인이 노래한 얼레지는
“차마 눈을 뜨고 수군거리는 세상을 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살아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많은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꽃이었다.
그래서 얼레지의 꽃에 새겨진 무늬는
눈물자위가 번져나간 ‘얼룩’이었고, 또 ‘피멍’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연분홍 얼굴’로 끌려가던 처녀 시절은 모두 기억 속에만 남고
이제는 늙어 ‘얼룩얼룩’ 얼굴에 핀 ‘검버섯’이었다.
나는 한 행사에서 그의 육성으로 그 시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레지를 직접 마주한 나는
꽃에 장식된 무늬를 예쁜 눈화장으로 돌려주고 싶었고,
가지런히 세운 꽃잎도 곱게 빗어 단장한 머리로 봐주고 싶었다.
그것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이 아니라
참 곱던 할머니의 처녀 시절로 보고 싶었다.
내 앞에 얼레지는 그렇게 분홍빛 얼굴의 처녀로 다소곳이 서 있었다.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눈화장은 다소 파격적으로 하고.
또 머리도 아주 곱게 빗어 갖가지 모양으로 올린 채.
빤히 보면 부끄러워 하면서도, 또 봐주길 바라는 듯한 자태로.

6 thoughts on “얼레지 – 남한산성 산자락에서 만난 꽃들 4

  1. 양수리 두물머리 가서 사진을 찍고 왔답니다
    남편에게 꽃마리 사진, 양지꽃들 찍으라고 했더니
    엎드려서 넘 힘들다고 하네요..ㅋㅋㅋ
    동원님의 산뜻한 사진…글에 항상 감사 드려요…
    오늘 선배 언니 CD가 나왔는데,
    제가 작사 해 준 노래도 포함 되어 있어요
    지나가는 말로 시 좀 써 달라고 하기에..저도 순간적으로 써 드렸는데
    이렇게 CD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스페인 노래에 가사를 붙였죠…
    주로secred song인데..제기 처음으로 망원렌즈로 찍은 새 사진도 넣었네요…ㅎㅎ
    저희 학교 쉼터에 제게 넘 감사한다고..사랑한다고 글을 남기셨어요…!!!
    동원님과 forest님께 선물 해 드리고픈데..주소 갈쳐 주시면 보내 드릴께요…
    운전 하시면서 들으셔요…제가 넘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언니도 두 번 째 CD이고, 아직 미흡 하지만..열정으로 내셨답니다…
    제 교회 목사님들께도 선물 하려고요…
    인터넷 인연이지만, 웬지 보여 드리고 싶네요…^^*

  2. 서러운 세월만으로도 억울한데 왜 고갤 숙이고 살아야…
    며칠전 뉴스보다가 친일파 기사에서 “이제는 일본을 용서하고…”란 문구를 보고
    어찌나 열이 받던지요? 무릎꿇고 사죄해도 모자랄판에 누구 맘대로 용서를 한다는건지 진짜 잘못봤나 싶었네요.

    1. 운하에, 영어 몰입 교육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땅투기 관료들에…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킨 대통령도 드물 것 같아요.
      일본을 용서한다는 게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덮어주고 잊는 건 아닐텐데 그것도 구별못하고… 요즘은 뉴스보고 있으면 속만 터져요.

  3. 안녕하세요, 저 얄라셩입니다.
    5월 3일~4일 (혹은 4일~5일) 이번에 열린 지리산 휘감는 ‘사색의 길’ 도보길 여행은 어떠신지요?
    ‘어느 별에서’님께서 이번에 산에 가자고 제안하시던데
    근교의 산도 좋을 듯하지만, 지리산 언저리를 한번 둘러보고 와도 좋을 듯 해서요.
    뭐 당일 코스로 갔다와도 들 것 같은데…

    남원에서 함양까지 이어진 21Km 도보길이라네요.
    지리산 능선이 아니 그 아래 마을들을 지나는 길이에요.
    참고사이트는 한겨레 신문입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284968.html
    가능하신지 여부를 쪽지로 보내주실래요?
    인원이 되면 한 번 가보게요. ^^
    그럼, 수고하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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