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길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9월 3일 강원도 정선의 몰운대에서


아득하도록 높이를 세운 정선 몰운대,
그 절벽 위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본다.
밭과 밭 사이로
길 하나가 밭을 둥글게 껴안고 산으로 올라간다.
매운 길이다.
길의 양옆으로 고추밭이 자리한 까닭이다.
길에 무슨 맵거나 짠 길이 있을까 싶지만 생각해 보시라.
꽃이 심어진 길은 졸지에 꽃길이 되지 않던가.
그러니 고추밭과 고추밭 사이의 길이 매운 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매운 길이지만
마을의 농부가 그 밭에 감자를 심어 놓으면
밭 사이의 그 길에선
감자가 땅속에서 익어갈 때쯤 동글동글한 꿈냄새가 피어오른다.
그러면 그 길은 동글동글한 꿈길이 된다.
고구마를 심어 놓으면
고구마의 달콤한 맛에 물들어
길은 졸지에 달콤한 길이 된다.
굳이 밭 사이의 길이 아니라도 좋다.
벼가 노랗게 익어갈 때쯤 가을녘의 논두렁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때의 논두렁길에선 윤기가 별처럼 반짝 거리는 햇밥의 찰진 맛이 난다.
밭과 밭 사이, 혹은 논의 한가운데로 흘러가는 길은
그렇게 갖가지 맛을 내거나 동글동글한 꿈에 젖는다.
정선의 몰운대, 그 아득한 높이의 절벽에서 내려다본 밭과 밭 사이에선
매운 길 하나가 밭을 둥글게 안았다 풀었다 하며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9월 3일 강원도 정선의 몰운대에서

14 thoughts on “매운 길

  1. 몰운대랑 인사동 사진도 아직 정리가 덜 됐는데
    내일 또 좋은 곳 가서 사진 많이 찍어오면
    심히 부담스럽겠는데요…ㅎㅎㅎ행복한 고민을 해봅니다.^^

  2. 아.. 아니군요.
    생각해보니 진짜로 매울까 했는데.
    진짜 매웠다면 재미있었을텐데요.

    이메일 잘 받았습니다.

    바쁘실텐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그럼 길이 철마다 얼굴을 바꾸게 되지요.
    겨울에 한번 눈왔다 하면 1m는 오는 곳이라고 하니
    그때는 잠시 눈속에 길을 묻어둘 것 같아요.
    그때가면 아는 사람만 짐작하는 하얀 심연 속의 길이 될테지요.
    생각만 해도 한겨울 눈소식 왔을 때 가보고 싶네요.
    저기 하얀 심연 속에 길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짜릿함이 있을 듯해요.

  4. 이 길이 그날 말씀하신 바로 그 매운 길이군요^^
    전 개인적으로 걷고 싶지 않은 길…
    매운거에 아주 약함..^^;

    1. 그럼 율리님께는 특별히 빨갛고 파란 길로 바꾸어 드립니다.
      이름하여 빨파길.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포스런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빨간 고추 줄까, 파란 고추 줄까 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거든요. ㅋㅋ

  5. 매운 길…
    우리가 걸어 가는 삶의 길도 매운 길이 아닐까…
    멀리서 보았을 때는 포도밭 길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매운 길’이었군요.
    길마다 냄새를 붙여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잠시 가져봅니다.

    1. 명명하면 세상이 많이 재미나 집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길에 냄새의 이름을 주었더니
      모든 길을 걸을 때마다 코끝에 온갖 향의 바람이 일더라… ㅋ

    1. 멀리서 봐서 그렇지
      가까이서 보면 아래쪽으로 상당히 붉다.
      고추들이 빨갛게 잘 익었더라.
      하긴 고추딸 일을 생각하면 정말 매운 길 되겠다.

    2. 얼마나 힘들면 고추 딸 때 부르는 노동요가 다 있을라구…

      언젠가 정선 할머님들이 고추 따면서 부르는 민요를 듣는데
      시집살이 매운 설움, 고추따는 매운 설움에 대해 노래하더라.
      그 이후로 고추따는 건 매운 설움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어.

    1. 실제로 산으로 날아올라가지요.
      용대신 제가 좀 땀을 뽑아야 하긴 하지만요. ㅋ

      저 길을 따라가면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으로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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