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들어온 다음 날,
둘이 마주 앉아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다가
그녀가 묻는다.
“동원이 형은 꿈이 뭐야?”
“하긴 한 때 나에게도 그런게 있었지.”
서른이 되기 전엔 꿈이라고 이름붙여도 좋을 그런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긴 하지만
좋은 글을 딱 100편만 쓰고
서른 중반을 넘기기 전에 죽어버리는게 그때의 내 꿈이었다.
오래 살면 젊었을 때 써놓은 좋은 글을
글과 어긋난 내 삶으로 오염시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십을 바라보는 문턱까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럼 지금의 꿈은 뭐야?”
“지금? 지금이야 하루하루 견디는 게 내 꿈이지 뭐.
아, 오늘 하루도 또 견뎠어! 꿈이 또 이루어졌어!
그러면서 살아가는 게 내 꿈이지 뭐.”
그 말이 그녀의 뱃속에서 딱 걸렸다.
뱃속에서 걸린 그 말은 아주 심한 체증이 되었다.
어찌나 심하게 체했는지 영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에 체하면 약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녀는 내 말에 체했다.
말에 체하니 정말 약도 없었다.
나는 내 말이 그녀의 뱃속에서 딱 걸린 것도 모르고
사실은 하루하루를 견뎌가는 그 꿈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계속 말을 늘어놓았었다.
“사실 견뎌간다는게 대단한거 아냐?
그게 꿈이라면 하루하루를 견뎌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냥 꿈을 꾸는데 그치지 않고 매일 꿈을 이루면서 살아가는게 되는 거잖아.
그게 무슨 꿈인가 싶지만 시지프스를 생각해봐.
시지프스는 언덕으로 돌을 굴려올리라는 형벌을 받았다잖아.
굴려올리면 굴러떨어지고,
굴려올리면 또 다시 굴러떨어지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형벌이었다잖아.
그런 형벌만큼 가혹한게 어디 있겠어.
하지만 시지프스는 그저 견딜 수밖에 없는 그 형벌을 자신의 꿈으로 만들잖아.
한번 굴려올릴 때마다 또 성공했다는 희열로 들뜨잖아.
그러면서 그를 벌주려던 신들의 의도를 보기 좋게 배반해 버리지.
도저히 꿈이 될 수 없는 것을 꿈으로 만드는 것만큼 대단한 꿈도 없는 거 같아.
하루하루 견뎌간다는게 그게 시지프스의 꿈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오, 오늘도 또 하루를 견뎠어!
나도 그 꿈과 희열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살아가는 거지 뭐.”
그러나 그 말은 그녀의 뱃속에 걸린 내 말을 밀어내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고스란히 쌓여 그녀의 체증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내 말에 체했고, 이번에 그 체증은 아주 오래갔다.
난 내 말을 좋은 영양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과 달리 내 말은 참 소화가 안되는가 보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래도 시지프스에게 형벌을 내린 게
자신이 아니었나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분명하게 말해주는데, 그건 아니야.
넌, 신이 아니거든.
그러니 내 말에 좀 체하지좀 마라.
우린 사실 둘이 함께 견뎌가고 있는 중이지.
서로를 바위삼아 언덕으로 굴려올리면서…
그러다 그 바위가 입맞춤을 받은 개구리 왕자나 두꺼비 공주처럼
펑하고 변신을 하여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는 희열의 날들을 살기도 하면서…
사랑해, 나의 시지프스, 기옥이.
또 살아가자구.
13 thoughts on “그녀, 말에 체하다”
저도 말에 잘 체하는 편인데…
체하면 전 폭력적이게 되요~사방 1Km 대피~!!!
그건 오히려 다행.
이건 체해서 누워있으니까 더 이상 뭔 말도 못하겠고…
큰소리 내고 싸우면 좀 시원한데는 있더라구요.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그게 좀 흠이긴 하지만… ㅋㅋ
ㅋㅋㅋㅋ
언니가 이 사진이랑 글이랑 봤다며,
짠했다고 찡했다고 눈이 붉어지는 거예요.
두분의 사랑에 양거자매 뒷켠에서 감동했다는ㅋㅋ
동원님은 진정 연애편지를 잘 적으시는 것 같아요. 인정! ㅎ
이건 연애편지는 아니고… 제가 속을 너무 썩여서… 그냥 적은 거였어요.
내 안의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하다 보니…
낼 백령도 여행가는 날이라 설레여서
일도 손에 안잡히고 해서 놀러왔다가 한참을 웃고갑니다.
두분이 밥상머리에서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ㅎㅎㅎ
내 꿈은 언제 이루어질래나~ ^^
부러워라.
좋은 사진 많이 찍어가지고 와요.
어제는 함께 한강에 나가 걷다가 들어왔어요.
천호동서 딸만나 함께 들어왔죠.
명공님의 꿈은 이루어졌잖아요. 약속 받았다면서 뭘.
forest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듯이 시지프스로 풀어 내시는 분이 있잖아요
제 남편은 시지프스가 뭔지 알려나요..ㅋㅋ
지금 저도 막 수필하나 쓸려고 했거든요
저의 남편의 소화제 같은 말이요(약간 분위기가 엇나가나요?)
그제 교회 다녀 와서 드라이브 가잔 남편이 옆에 기다리는데
카페에 사진 올리고 싶어서 올리면서 글까지 덧붙이고,
어느덧 어둑 해졋는데..
그때서 제가 나가자고 하니, 남편의 얼굴이 약간 굳어있다가
“당신이 좋으면 됐지…”~~~
제가 미안해서 나가자고 하니..
따라 나오며,드라이브 하며 외식까지 시켜 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넘 고마워서 “당신이 좋으면 됐지”란 제목으로 글 쓰려고요..ㅎ
forest님이 화끈 하신 것 같던데
동원님이 시지프스 말씀은 그만 두시고..산책 하시면 좋을 듯 하네요..
월말 마감이라 사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마감 끝나면 남한산성 같은 곳으로 같이 사진이나 찍으러 갈까 생각 중입니다.
염려 고맙습니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사진 속의 forest님 글 속의 forest님과 어우러져 참으로 사랑스러우시네요.
(제가 이런 표현을 막 해도 되는 건지 몰르겠어요.ㅎㅎㅎ)
이미 소화는 다 되셨겠지만 이 글은 활명수 열 병의 효험이 있을 듯 한데요.
지금 그 사진 너무 우울해 보인다고 바꿔달라고 해서 사진 찾고 있어요.
이제 겨우 괜찮아 진 듯 싶어요.
이번에 체한 건 정말 오래 가네요.
내 참 원, 뭔 말도 못하게 해.
오늘 글은 저를 참 돌아보게 만들어요.
저도 우리 애기 엄마에게 말로 상처를 줄 때가 많아요. 저는 별 의미없이 한 말일지라도 상대방은 그걸 기대하지 않고 뭔가 희망적이고 밝은 이야기를 바라고 있었을텐데..
일단 형수님께서 꿈에 대해 여쭤보셨을 때도 아마 그랬을거예요. 뮤지컬을 보고 들뜬 마음에 뭔가 좋은 내용을 기대하셨으리라는 분위기였을텐데..
동원 형님~~ 형수님께 그 체증을 풀려면 “사랑의 약” 따뜻한 손길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소화제일것 같네요.
뜨거운 포옹은 몇번 했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