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2008

올해도 해가 시작될 때는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은 곳들이 있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그곳의 이름들을 손에 쥐고
그곳으로의 여행을 희망으로 삼았었다.
벌써 두 해째 거르고 있는 설악산행도 그 중의 하나였고,
처음으로 작은 카메라들고 혼자 떠났던 속리산도 다시 가보고 싶었다.
손을 펴보니 여전히 그 이름들은 내 손에 그대로 쥐어져 있다.
올해도 멀리는 못가고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역시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내 사는 근처에 볼만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에 하나씩 골라 12장의 사진으로 올 한해를 정리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월 15일 강원도 오대산)

1
눈덮인 산을 가고 있노라면
맑고 투명한 물속을 가고 있는 느낌이다.
맑고 투명한 물은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충동질한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내린 산은
산속 깊이 하염없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한다.
1월의 어느 하루, 그 눈덮인 산을 하루 종일 쏘다니다 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2월 26일 우리집 옥상)

2
옥상의 양철 처마끝에
하얀 눈떡과 눈빵이 걸렸다.
햇님이 지나가며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햇님의 입안에선 살살녹는 달콤한 맛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16일 미사리 한강변)

3
한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강쪽으로 시선을 두고 서 있었다.
빈가지를 빗자루의 솔처럼 거꾸로 들고 선 나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간지럽히듯 하늘을 쓸고 있었다.
사람들을 담았다 비워냈다 하면
한강변 뚝길이 쉼없이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나무들이 한참 동안 사람들을 기다리며
그곳의 풍경을 홀로 지키고 있곤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14일 경기도 하남의 객산)

4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는 길에 진달래를 만났다.
항상 분홍빛 얼굴색이 고운 꽃이었는데
올해보니 잎들이 푸르게 지저귀는 꽃이기도 했다.
푸른 목젖이 다 보이는 진달래의 노래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5월 9일 서울 청계광장)

5
올여름 내가 사는 서울의 도심에선
촛불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꿈이 그 꽃의 자양분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완력으로 그 촛불을 짓밟아버리려 했지만
여름내내 이어진 촛불은 질경이처럼 살아남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처음 그 촛불의 꽃을 마주한 것이 5월 9일이다.
잊을 수 없는 날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6월 21일 서울 올림픽공원)

6
산딸나무의 꽃은 하얗다.
꽃과 함께 있을 때는 그 하얀 품에 묻혀 살더니
꽃잎을 보내고 나자 열매들만 홀로 남았다.
홀로 남은 열매들은 모두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고개를 길게 뺐다.
내가 나타났지만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는게 나는 아니었던가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7월 26일 우리집)

7
올해는 집의 화분에 토마토를 심었다.
붉은 빛이 좀 예쁘다 싶으면 곧장 따서 먹곤 했다.
비가 한줄기 긋고 지나가는 날이면
토마토 아래로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열려있곤 했다.
그 물방울은 따먹지 않았다.
조금 익었다 싶으면 물방울은 밑의 화분이 낼름 받아먹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8월 16일 경기도 양평의 소리산 아래쪽)

8
초여름의 논은 그림을 기다리는 빈 캔버스이다.
8월의 논엔 푸른 그림이 가득차 있다.
가을이 되면 푸른 그림에 노란빛이 덧입혀진다.
색으로만 차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맛이 되는 그림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9월 30일 서울 종로)

9
거대한 건물들과 건물들의 사이로
푸른 하늘을 끌고 구름이 흐른다.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계곡으로
하얀 물거품을 내며 하늘이 흘러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0월 23일 우리집 마당)

10
매년 꽃이름을 새롭게 챙기고 있다.
올해 몇가지 꽃이름을 새롭게 알았다.
부겐빌레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잎은 무성했지만 꽃은 딱 한송이만 피었다.
윤후명의 소설 속에서 그 이름으로 먼저 만났던 꽃이다.
무수한 사람들을 이름도 모르며 지나치면서
매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이름을 주고 받으며 아는 사이가 되고 있다.
꽃과 풀도 이름도 모르고 지나치다가 매년 그 이름을 새롭게 챙긴다.
꽃과 풀은 이름 하나만 알면
그 꽃과 풀은 모두 다 알게 되는 놀라움이 있다.
부겐빌레아도 그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 세상의 모든 부겐빌레아와 알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1월 23일 인천 영종도의 왕산해수욕장)

11
오래 간만에 바다에 갔다.
보통은 바다를 위로 올려
바다를 내 마음에 한가득 담아가지고 오는데
이번에는 바다를 아래쪽으로 내려
하늘을 한가득 담아가지고 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12월 12일 서울 상일동의 화원)

12
꽃은 같은 꽃인데
한 꽃은 붉다.
작은 화분에 담긴 흙속에서
용케도 붉은 빛을 찾아내
그것으로 제 삶을 삼는다.
한 꽃은 노랗다.
같은 흙속에서
용케도 노란 빛만 골라내
제 얼굴빛으로 삼는다.
아무리 파헤쳐도 흙뿐인데
그 속에서 용하게 색을 골라낸다.
모두가 같은 삶 같아도
삶의 토양 속에서
용케도 자기 색을 골라내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17 thoughts on “Photo 2008

  1.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빽님의 사진과 글을 보는 과정은 제게 짧은 명상의 시간을 제공합니다. 덕분에 아직 되돌아보지 않은 지난 1년을 훑기라도 했습니다.

    봄날의 햇살 같은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1. 장기를 두는 것도 아닌데 그 점은 장군멍군인 셈이어서 저도 네다님 글이나 블로그 이웃들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공간에 관계없이 글과 그 글에 담긴 생각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고마울 때가 많습니다.

      공부 잘 마무리하시고… 좋은 성과 있길 빌께요.

  2. 털보형님 사진을 보니 저도 같이 사진여행에 동행한 듯 여겨집니다.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형님의 따듯한 시선에서 늘 행복한 감상을
    하곤 했지요.
    새해에도 형님댁에 늘 웃음이 넘치는 가정이 되길 바래요.

  3. 사진으로 글로 교감 하면서 많이 배우고 행복한 한 해였어요
    12장 사진에 머물면서 또 감탄하게 되네요

    기축년에도 많은 이야기 해 주실거죠?
    새해에도 건강하시고..복 된 나날들 되세요 ^0^~

    1. 새해에는 책좀 읽고 좀더 깊이있는 글들을 선물할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요즘 너무 날림으로 사는 것 같아 반성도 하게 되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4. 정리정돈을 참 잘 하셨습니다. ^^
    특히나 촛불은 참 가슴이 아련…하구요.

    저도 곧 정리해서 선물로 날려야겠는데 말이지요.
    사진으로 만드는 달력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한 번 시도해보심도 좋을 듯 싶습니다~~

    1. 한해의 끝에 한달마다 한장씩 사진 고르는 것도 재미가 크더라구요. 어디갔었는지 다시 한번 추억에 잠기기도 하구요.

      내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여름 휴가라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빌어요.

    1. 카랑코에, Kalanchoe라고 하더군요. 분홍색도 있고… 색은 아주 여러가지 였어요. 마다가스카르나 아프리카가 원산이라고 합니다. 꽃집에 가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어요.

  5. 동원님표 달력 한권 어떻게 안될까요? 하고
    forest님 옆구리 쿡쿡 찌르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가…
    햇님이 살살 파먹은 호빵, 햇살 듬뿍 머금은 진달래,
    집 앞마당에 살짝 자리잡은 이름도 존재도 엄청 귀한 꽃 한송이
    다 소중해 보여요.
    매 순간이 새로운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1. 만들었으면 1순위로 드렸을텐데…

      진달래 곱던 객산이 특히 그립군요. 아직도 가보지 않은 길들이 많으니 슬슬 시간나는대로 근처의 산으로 쏘다녀 봐야 겠어요.

      년말에 얼굴봐서 좋았습니다.

  6. 오늘도 어김없이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겠군요.
    달력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이를 아주 효율적으로 부리고자 만들었다고 믿는지라
    그 의미에 무게를 두고 싶지 않지만
    그럴수록 점점 옭매이기 됩니다.
    마치 이제는 떠난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능 목걸이를 준 산타와 좋은 추억여행도 다녀오시고요.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1. 고맙습니다.
      2월에 고향에나 한번 갔다올까 생각 중입니다.

      나무님 블로그에 들러서 웃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요즘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이 땅 어디선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곤 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7. 말 없음표……..
    12 장의 사진과 글을 읽으면서 아, 하는 감동이 속에서 올라옵니다.
    지나온 시간들이 저렇듯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나 혼자만 소외된 듯 쓸쓸함에 젖어 산 것은 아닐까… 꽃과 하늘, 풀과 나무들, 사람들, 그 속에 젖어 있는 ‘마음’이 따스합니다.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모퉁이가 아닌가 싶어요. 그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1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늘 같은 마음을 같게 되지요. 뒤돌아보지 말자… 그렇게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새해에도 열심히 동원님 글과 사진 보러 달려올께요. 새해에도 좋은 사진 좋은 글 많이 많이 보여주세요.

    1. 하루하루로 치면 일년에 365번, 일주일로 치면 50여번, 한달로 치면 12번의 매듭과 시작이 있는 셈이지만 역시 한해 단위로 갖는 그 한번의 매듭과 시작이 가장 의미있게 다가오는 듯 싶습니다. 새해에는 사진 공부도 좀 더하고, 저의 주변 것을 찬찬히 살펴봐야 겠어요. 앉은 자리 어디서나 세상을 새롭게 읽어냈던 시인 오규원처럼 세상을 찬찬히 탐험해 봐야 겠어요.
      항상 들러주시는 거, 고맙구요, 내년에도 사과나무님 뵙는 것이 저의 행복과 즐거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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