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여름,
시흥의 관곡지에서 찍은
연잎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하트 모양이다.
하트 모양이 눈에 들어와서 찍은 것이니 당연하다.
아래쪽으로 흙이 묻어 있어 약간 거뭇거뭇하다.
수염을 연상시킨다.
하트와 수염이라는 두 가지의 연상을 하나로 묶어
나는 이 사진에서 수염난 한 남자의 사랑 고백을 상상한다.
그 사랑 고백 앞에서 여자가 말한다.
“수염이나 좀 깎고 와서 고백하셔.
아님 아예 멋지게 기른 다음에 고백해 보시던가.
수염은 고만할 때가 제일로 따가워.
어디 마음에 들어도 수염 따가워서 화끈하게 받아줄 수나 있겠어.
사랑 고백하시기 전에 턱이나 좀 정리하고 오셔.
그 전에는 턱도 없어.”
아마도 남자는 바람처럼 쌩하니 달려가 턱을 말끔히 밀었을 것이고
다시 숨넘어가도록 달려와 여자 앞으로 섰을 것이다.
물론 여자는 뜨겁게 키스하며 수염밀고온 남자의 사랑을 받아 주었겠지.
아, 요 후반부는 내 상상력은 아니다.
요건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에서 한 대목을 빌려와 슬쩍 변주한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 속에서 종종 하트 문양을 발견하곤 한다.
주로 잎들에게서 많이 찾게 된다.
그 하트 문양은 상상력을 일으켜 세워주고
그 상상력 속에선 사랑의 대화가 오고가곤 한다.
그러나 종이 위에 반듯하게 그려진 하트 문양이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다같은 하트 문양인데
유독 자연 속에서 만나는 하트 문양만
사랑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일까.
『시각적 문법』이란 책을 읽다 보니
물체의 형태를 세 가지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즉 어떤 물체의 형태는
기하학적 형태, 유기체적 형태, 임의적 형태의
세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하트(heart)도 마찬가지다.
첫번째인 기하학적 형태(Geometric form)란
점, 선, 면, 입체에 대한 수학적 정의를 기반으로 표현되는 형태를 말한다.
이 경우 하트라는 형태는 원이나 정사각형과 비슷한 수학적 차원의 도형이 된다.
두번째의 유기체적 형태(Organic form)에선
유기체란 말이 무척 어렵게 다가온다.
유기체는 살아있는 생물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유기체적 형태란 살아있는 생물체가 만들어내는 형태를 말한다.
이 유기체적 형태로서의 물체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에 따라 수학적 도형이던 하트가 심장을 뜻하고, 사랑을 의미하게 된다.
기하학적 형태의 느낌이 건조하고 딱딱하다면
유기체적 형태에선 인간적인 혹은 자연적인 생명감과 따뜻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세번째의 임의적 형태(Random form)는
무의식적인 인간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자연의 돌발적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형태를 말한다.
모양은 하트와 비슷하지만 혼란스러운 느낌이 많이 난다.
(아래 첨부된 그림에서 위로부터 차례대로
기하학적 형태, 유기체적 형태, 임의적 형태의 하트이다.)
아하, 그런 것이었나.
그러고 보니 잎들이 만들어내는 하트 모양에 자꾸 눈이 가고
그 모양이 사랑의 상상력을 촉발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랑은 엄격한 수학적 정의를 통하여 재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랑이 너무 혼란스러우면 이게 사랑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은 과학의 엄격함과 혼돈의 사이, 그 중간쯤으로 놓여있다.
사랑의 느낌은 그 무엇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감이다.
알고보면 모양이 하트 모양이어서 사랑의 상상력이 고개를 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들이어서 사랑의 상상이 가능했다.
사랑은 곧 살아있음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의 상상력을 촉발시킨 것이 자연속의 잎들이었던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인용한 책
Christian Leborg, Visual Grammar,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2006
2 thoughts on “형태의 종류”
하트 모양의 연잎이 사랑의 마술사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지난 봄이던가요. 생강나무잎 사진을 보면서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트 모양의 잎사귀를 보면서 대번에 ‘사랑스럽다’라는 느낌이 들었지요. 기하학적이지도 유기체적이지도 그리고 임의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적인 사랑은 스스로 ‘사랑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요.
참 신기한 것은 사랑할 때는 글도 잘 써지고 하는데 신경질나거나 화가 날 때는 글도 잘 안된다는 거예요. 뭐든 사랑에서 솟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