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금요일, 서울에 눈이 내렸다.
눈이 온다고 그녀를 깨웠더니 그녀가 물었다.
눈 오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난 눈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아직 잠결에 묻혀있던 내 귓속으로
분명 누군가 골목에서 눈을 쓰는 소리가 파고 들고 있었다.
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고
바깥에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은 펑펑 내리면서 소리는 하나도 내지 않는다.
카메라 챙기고 집을 나섰다.
가까운 덕소로 가서 숲길을 걸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운길산을 넘어 수종사로 가게 되었다.
오늘은 새재고개 바로 너머까지의 여정이다.
버스에서 내려 새재고개 입구로 걸어갔다.
전에는 처음 와본 길이었지만 이제는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다.
길의 입구에 눈에 익은 사람들이 있다.
트럭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부부이다.
두번째 오니 아는 얼굴이 된다.
과일 부부를 지나쳐 마을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길가에서 처마가 빨간 집 한채가 눈길을 끌어당겼다.
전에도 새재고개로 갈 때 보았던 집이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다.
눈이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눈은 평범한 풍경도 그림으로 만든다.
중간에 전에 갔던 길을 버리고 어룡마을로 들어섰다.
눈밭에 경운기 한 대가 서 있다.
봄이 오면 다시 경운기가 갈고 엎어 한 해 농사를 시작할 밭이다.
오늘은 그 밭을 눈이 하얗게 덮어 재워두고 있다.
항상 뾰족한 잎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어느 집의 정원수가
눈으로 부드럽게 무마가 되었다.
눈은 그 날카로운 잎에 찔려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는다.
눈은 찔리는게 아니라 사실은 그 날카로운 잎과 깊게 포옹한다.
날카로움과 그렇게 깊게 포옹할 수 있는 사랑은 눈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런 사랑은 절대로 흉내내지 마시라.
논은 텅비어 있고,
논으로 가는 길에도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다.
세상이 모두 하얗게 텅비어 있다.
무엇인가를 텅비웠을 때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듯하다.
저 길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올라가면
새재고개로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전에 올라갔던 길을 저 끝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은 무슨 소식이 왔을까.
무슨 소식은 무슨 소식.
바로 눈 소식이지.
며칠 전 보았던 목련의 몽우리에도
오늘은 눈이 쌓여 있다.
봄이 오면 눈처럼 흰 꽃이 피어날 것이다.
어느 날 산을 내려오던 내가 바위 위에 앉았다 갔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바위 위에 앉아 쉬었다 갔을 것이다.
날이 좋을 때는 화창한 햇볕이 앉아서 쉬었다.
눈이 내리자 눈이 앉아 휴식을 청한다.
누군가 눈을 치워보려 한 것 같다.
하지만 한번 자리를 차지한 눈은 바위 위에서 내려오려 하질 않았다.
그러나 눈도 곧 그 고집을 꺾고 자리를 비워줄 것이다.
바위는 모든 것들에게 앉아서 쉴 자리를 내어준다.
이거, 고마운 걸.
그렇지만 바위는 아니라고 했다.
“난 평생 이렇게 앉아서 쉬고 있는 걸, 뭐.
없는 것을 억지도 내놓는 것도 아니고 내게 가장 넉넉한 것을 나누는 거야.
내게 가장 넉넉한 것이 바로 이렇게 앉아서 쉬는 한없는 휴식이거든.
세상 모두에게 나누어 주어도 되니 언제든지 길 가다가 앉아서 쉬어가.”
참, 내 원. 바위도 말을 하다니…
다음에 갔을 때는 또 무슨 얘기를 들려줄지 모르겠다.
갈잎 위에 하얀 눈이 덮였다.
항상 바스락대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속닥이던 갈잎이
잠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새재고개로 올라서서 약수터 방향으로 걸어갔다.
길이 거의 평탄하게 펼쳐진다.
산에서 길을 갈 때면
종종 길은 저만치 앞을 선다.
내가 빨리 걸음하면 길도 빨리 앞서고,
천천히 걸음하면 길도 천천히 앞선다.
내가 어떻게 걸어도 절대로 나를 팽개치고 가는 법은 없다.
가끔 내가 앞서가는 길을 팽개치고 샛길로 슬쩍 새기도 한다.
앞서간 길은 가끔 잃어버린 나 때문에 당황하곤 했을 것이다.
가다가 서서 뒤를 돌아본다.
길을 가면 내가 간 길은 항상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다.
가끔 끈덕지게 뒤쫓아 오는 길을 보면 강아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난 길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잠깐 숲으로 숨기도 한다.
숨었다 나오면 그 자리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다.
내가 길을 가는 동안
앞길이 앞을 서고, 뒷길은 항상 나를 쫓아온다.
6 thoughts on “어룡마을에서 새재고개까지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1”
눈길을 서산대사처럼 걸어가셨군요.
아님 서산대사가 걸어 간 길을 뒤따라 가셨던지…
절가는 길이니 서산대사가 언젠가 걸었던 길이 맞지 싶습니다.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포옹하는 눈의 사랑 저도 배우고 싶네요!
흰눈이 내린 하얀지붕과 하얀벽이 어쩌면 이굴루 기와집 같죠~ ㅋ
눈은 포옹의 선수인 듯 싶어요.
Hug의 원조라고나 할까.
저 눈길을 걸어 갔을 동원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네요.
혹 미끄러지지는 않았나요…
아무생각 없이 하염없이 길을 따라서 걷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조금은 삶의 걸음걸이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산길은 미끄럽지 않았는데
차들이 반들반들 다져놓은 동네의 길들이 미끄러웠어요.
휘청만 하고 다행히 꽈당은 없었습니다.
눈이 내릴 때 강원도 한번 가주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