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금요일, 눈이 불러낸 운길산 산행은
전처럼 덕소에서 시작되었다.
산을 탈 생각이 아니어서
카메라 이외에는 별로 준비한 것이 없었다.
오늘은 새재고개를 넘어가면 만나는 약수터에서
운길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까지 가본다.
새재고개를 넘어가면 가장 반가운 것은 그곳의 약수터이다.
이 겨울에도 물이 끊이질 않는다.
그곳쯤 가면 목이 마르게 마련이다.
전에도 여기서 목을 축였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복잡할 땐 물을 받으려는 통이 줄을 서 있었는데
오늘은 사람마저 한가롭다.
천천히 여유있게 마실 수 있었다.
약수터에서 보니 언젠가 길을 잘못들어 내려갔던
시우리 마을이 저 멀리 내려다 보인다.
눈으로 인해 마을의 윤곽이 확연하다.
그때 간 곳이 바로 저 곳이었구나.
두 번째 오니 흐릿하던 과거가 분명해진다.
가끔 현재가 과거를 더 분명하게 살려놓기도 한다.
약수터에 마련된 평행봉.
오늘은 눈이 부여잡고 있다.
새재고개 약수터엔 약수가 둘이다.
하나는 수량이 좀 많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작은 약수는 물줄기가 좀더 가늘다.
그 물이 밑에서 얼어 얼음이 되었고,
몸짓을 키운 얼음이 이제는 물을 받아먹고 있다.
얼음도 물이었을텐데 이제는 물에 목마른 신세가 되었다.
인생이 그렇다.
가끔 과거의 내가 목마를 때가 있다.
길도 하얗게 흘러가고,
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하늘도 하얗다.
모두 저 끝으로 흘러간다.
나도 따라간다.
나무는 가지를 펼쳐 제 품을 넓힌다.
나도 팔을 옆으로 뻗으면 나무처럼 내 품을 넓힐 수 있을까.
나무를 앞에 두고 팔을 뻗으면 종종 내가 나무가 되는 기분이다.
중간에 좋은 일을 하나 했다.
운길산과 예봉산 방향으로 길이 나뉘는 갈림길에서
예봉산을 타고 그곳까지 온 나이가 좀 든 노인분들이
어디로 갈까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거의 모두가 그곳에서 그만 새재고개를 타고 도곡리로 내려가고 싶은 눈치였는데
한 분이 안내도 상으로 보니 운길산이 멀지 않다며
자꾸 산정상까지 가보자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운길상 정상까지는 길도 험하고 엄청 멀다고 말해주었다.
거보라며 모두 새재고개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그러니 뻥을 친 셈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때 정말 좋을 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운길산 방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올라온 길이 구불구불거리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길이 가파르게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길은 산의 북쪽을 타고 흘러가고,
산의 북쪽 사면은 아직 눈이 녹아내리질 않아 풍경이 많이 하얗다.
가다가는 한참을 서서 하얗게 채색된 나무들을 바라보곤 했다.
가지 사이에 눈이 얹혀 있다.
한마디 건넨다.
거기서 뭐하니?
“바보야, 보면 몰라.
갈림길이잖아.
어디로 갈지 생각좀 해야지.”
내가 보기엔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는데…
가다가 하늘 한번 올려다 본다.
약간 하늘이 벗겨지는가 싶다.
하지만 하늘은 벗겨지지 않았다.
약간의 낌새를 보이는 것을 끝으로 하늘은 하루 종일 흐렸다.
눈이 막그치고 곧바로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면
정말 그때의 풍경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나무와 파란 하늘과의 대비라니…
그런 풍경은 오대산과 대관령, 백담사갔을 때,
한 10분 정도씩밖에 구경하지 못한 것 같다.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닌 것 같다.
저기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원래가 내가 가고자 했던 숲길이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지난 번에도 저 길을 찾지 못해 시우리로 내려가고 말았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운길산으로 걸음을 들여놓고 말았다.
소나무는 똑바로 자라진 않는다.
소나무는 곡선의 미학을 즐기는 나무이다.
가을이 한창일 때,
타는 듯한 붉은 빛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휘어잡았을 당단풍이
오늘은 하얀 꽃을 피웠다.
그러고 보면 눈꽃은
제 나무를 가지지 못하고
뻐꾸기처럼 다른 잎에 둥지를 틀고 꽃을 피운다.
하지만 뻐꾸기처럼 슬프게 울진 않는다.
이제 좀 많이 올라왔는가 보다.
약간 시야가 트이고, 아래쪽으로 산의 능선이 내려다 보인다.
산은 올라가다 일정 높이마다 숨을 고르는 것이 재미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산을 내려다 보았다.
***이 글의 1편
어룡마을에서 새재고개까지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1
8 thoughts on “새재고개 약수터에서 중간 어딘가까지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2”
산길을 걷다 보면 인생과 참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숨이 차면 뒤돌아 보며 걸어온 길을 바라다보기도 하며
어느새 오른 정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산길 같지가 않습니다.
뭐에 홀렸는지 뒤는 고사하고 옆도 돌아보질 않고
냅다 달리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번 제대로 엎어져 무릎이 깨져봐야
그제서야 겨우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눈길은 한번 넘어져 볼만 합니다.
물론 눈이 좀더 내렸을 때 넘어져야 하긴 하지만요.
눈밭에 일부러 넘어진 사람을 내일 보여 드리겠습니다.
풍경과 글이 마음에 끌려 한참을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설산을 다녀오셨네요.
덕분에 간접 등산 잘 했습니다. 🙂
p.s. 실제로도 해야 뱃살이 들어갈텐데….
등산이 몸무게 줄이는데 그렇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요즘 알았어요.
축하드려요.
이제부터 공식적으로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를께요.
풍경이 너무 좋아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특히 눈 덮힌 겨울나무 모습…
황량하지만 그들 속에 감추어진 그리움이랄까, 기다림이랄까…
저도 숨을 고르면서 산을 내려갑니다.
아마도 눈이 몇번 더 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에 내린 것보다 한 세배 정도 더 왔으면 싶습니다.
종종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하얀 풍경을 호흡하곤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