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금요일,
덕소에서 시작되어 새재고개로 오른 걸음은
뜻하지 않게 운길산으로 이어졌다.
언젠가의 설악산 초행길처럼 멋도 모르고 간 길이었다.
난 항상 뭔가를 치밀하게 계획하는 법이 없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치밀하게 계획하여 한다고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자연으로 걸음할 때는 그렇다.
치밀하게 계획하여 가는 자연은
그냥 어디에 갔다왔다를 채워주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닌가 싶다.
그냥 되는대로 가서 자연을 만나고 있는 그대로 보고 읽을 때,
자연으로부터 가장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오늘은 정상을 거쳐 집으로 오는 전철을 탈 때까지의 여정이다.
운길산으로 가는 길에
자태가 예사롭지 않은 나무들을 많이 만났다.
설악산이나 오대산의 나무와 다른 점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높고 유명한 산의 나무들은 독야청청하는 측면이 큰데
낮은 산의 나무들은 덩치가 큰 고목들도 작은 나무들 속에 어울려 있다.
그러다 보니 사진찍기는 쉽지가 않다.
눈이 오니까 그 나무들이 하얀 눈으로 깨끗한 옷 한벌씩 해 입었다.
눈옷은 다 좋은데 금방 헤어지는게 흠이다.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아침에 해입은 눈옷이
벌써 여기저기 헤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꿰매 줄 수도 없고…
에이, 모르겠다, 가던 길이나 가자.
주변이 눈으로 덮이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산길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뱀처럼 휘어지고 있다.
혹시 산길은 모두 뱀이 간 흔적은 아닐까.
아니 뱀이 산길에서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을 배운 것인지도 모르지.
산길을 가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는 것은 틀린 말인 듯 싶다.
나무에 조금이라도 매달려 있어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란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은 꼿꼿하게 몸을 세운 직립의 나무들에
다닥다닥 붙어 하얀 눈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눈이 나무에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눈은 내려오면서 나무들과 포옹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세상을 사랑으로 껴안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말인가.
산길을 가는 동안 숲이 눈의 사랑으로 하얗다.
그러고보면 서로 껴안고 오래 사는 게 사랑이다.
그것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희디힌 눈의 사랑이다.
잠시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찼다.
그러자 나무들이 모두 태양에 대해 경배를 올리는 듯하다.
태양은 백지장처럼 창백하다.
가끔 태양이 저렇게 보일 때가 있다.
옛날이라면 두려웠을지도 모를 하늘의 풍경이다.
그렇지만 난 그냥 태양의 위치를 살펴
저 정도면 날이 지기에는 아직 여유 시간이 많이 남았네 정도를 점치고 있었다.
나무들이여, 두려워말라.
내가 아는데 별일 아니다.
칫, 좀 배웠다고 아는 척은.
산에 올라보면
유난히 사이가 진한 나무들이 많다.
나는 그런 나무들을 포옹나무라 부르곤 하는데
얘네들도 아무래도 그런 종의 하나인 듯 싶다.
나무 뿌리가 세상을 참으로 복잡하게 구획해가며
땅속으로 뻗어가고 있다.
눈이 오니 나무가 구획한 세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저렇게 세상을 이리저리 복잡하게 나누어 구획한 것일까.
어떻게 구획을 했건 그것이 나무의 생명을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생명이 또 땅을 살렸으리라.
나무가 구획한 세상은 결국은 서로 함께 사는 세상이었던 듯 싶다.
나도 좀 서로 함께 살도록 구획된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높이는 610m라고 한다.
별로 높지 않은 산인데 오르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고개에서 시작되는 길이어서 쉽게 생각했는데 그렇질 않았다.
운길산은 오르는 데 쉽지 않은 산이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오는 동안 왜 힘들었는지 이해가 간다.
내가 넘은 봉우리가 도대체 몇 개인지 하나 둘 셋 꼽다보니
훌쩍 다섯을 넘겨버린다.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산을 가보기는 또 처음인 것 같다.
여긴가 싶으면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러면서 이제 지친다 지쳐 싶을 때 드디어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운길산은 그렇게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은 아니었다.
이제 내려가는 길.
수종사까지는 정상에서 1km 정도라고 되어있었다.
다시 길은 뱀처럼 꼬불꼬불 휘어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그래도 신난다.
내려가다가 눈밭에서 장난도 좀 쳤다.
눈밭은 사랑을 하얗게 새길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곁을 보니 눈밭에 누군가 자신의 전신을 새겨놓고 갔다.
엎드려 새긴 것인지 누워서 새긴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종사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에
딱따구리가 나무쪼는 소리가 요란하여 올려다 보니
딱따구리 한마리가 벌레를 찾아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다.
이 날 처음으로 딱따구리 울음 소리를 들었다.
딱딱거리며 울줄 알았는데 울음 소리는 정말 곱고 아름다웠다.
딱따구리는 용하게 벌레를 찾아내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날아가 버렸다.
수종사에서 마을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매번 차로 올라가고 내려갔던 길을 이번에는 터덜터덜 걸어서 내려갔다.
중간중간 숲길이 있어 조금씩 질러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무슨 정자를 짓고 있는 길로 잘못 들어서 또 시간을 까먹었다.
산아래 마을로 내려오니 멀리 운길산역이 보인다.
지난 해 말, 그러니까 2008년 12월 29일에 생겼다고 들었다.
사실은 저 역이 있다는 사실에 그걸 믿고
운길산으로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놓은 것이기도 했다.
쉽게 집으로 갈 수 있는 차편이 있다는 것은
그곳으로 가게 만드는 대단한 유혹이 된다.
산아래 마을에 서 있던 표지판에는 빤히 보이는 운길산역까지
1km라고 되어 있었다.
눈길이라 상당히 미끄럽기는 했다.
두 번 정도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눈이 온 날은 산을 잘 내려온 뒤에 찻길에서 낙상할 수 있다.
전철 역에서 기다리는데
건너편 승강장으로 국수행 열차가 들어왔다 떠난다.
국수행 열차를 보니까 괜스리 국수가 한그릇 먹고 싶었다.
하지만 팔당을 지나 바로 다음 역인 도심역에서 내려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저녁은 그녀가 차려준 밥으로 채웠다.
간만에 또 산에 갔다 왔더니 기분은 좋았다.
***이 글의 1편과 2편
어룡마을에서 새재고개까지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1
새재고개 약수터에서 중간 어딘가까지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2
6 thoughts on “기어코 정상에 가다 – 운길산 넘어 수종사 가는 길 3”
저 자국은 러브 스토리 주인공 알리 맥그로우가 눈밭에서 장난친 것 같습니다.
혹시 눈 던지며 맞장구치다가 오신 것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사랑해’라고 써 놓은 것도 그렇고요.
알리 맥그로우를 기억하시는 군요.
그 눈장난 장면 참 인상적이었는데 말예요.
안타깝게도 혼자간 산행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눈 온 다음날엔 늘 중봉산에 가서 사진을 찍었지요. 눈 위에 벌러덩 누워 눈 위에 자국이 남으면 그걸 그렇게 불렀거든요. 눈을 쌓아 다져서 반질반질하게 돼지붕알도 만들고(좀 남사스러운데 다른 이름을 몰라서…)
어느 겨울 아버님 모시고 동해안 가느라 국수를 지나는데 외가가 국수여서 남한산성 근처에서부터 국수 외가집까지 걸어오곤 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1919년생이셨는데 역사책 안의 지식을 늘 현실로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국수리 국수집 된장수제비와 빈대떡이 갑자기 그립네요. 국수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을 갖고 있어요. 아주 오래전 80년 중반쯤의 이야기.. 이렇게 쓰고 나니 호호할머니가 된것 같아요.
남한산성에서 국수면 한강을 건너가는 거네요. 하긴 그 시절엔 지금의 팔당 한강물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댐이 있던 시절은 아니었으니 풍경이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역사가 다름없는 얘기네요.
국수 먹고 싶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라면 끓여주고 말았으니…으이구~
오늘은 맛난 닭칼국수 해줄게.^^
오늘은 축하 파티겸 한잔 해야지.
국수는 원래 뜻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국화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