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다는 것이
항상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목적지를 머리 속에서 지우고
그냥 하염없이 걷기도 한다.
그때면 우리들에게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냥 걷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혹은 그때의 길위에서 만나는 것들에게 손을 내밀며
잠시 그들과 노는 것을 길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3월 8일 일요일 오후,
덕소의 도심역 근처에서 시작하여
새재고개를 넘고 운길산역까지 걸어간 길도 그런 길이었다.
3월 8일에 갔던 그 길을 다시 걸으며
그 길에서 만난 풍경들과 또 한번 눈을 맞춘다.
새재고개 초입의 어룡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가게 하나.
페인트칠한 송판 위에 주인이 직접 씀직한,
혹은 학교다니는 집안의 아이에게 맡겨서 씀직한
어룡상회란 글자의 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아마 처음부터 상점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개의 요즘 상점은
속을 훤하게 드러내놓고 있는대로 다 보여주는 진열대나
혹은 바깥으로 나앉은 물건들 때문에
간판이 없어도 어렵지 않게 상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룡상회는 겉으로 봐선 간판 이외엔
상점이란 점을 짐작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마도 처음엔 그냥 살림집이었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 가게도 겸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겪으며 그 자리에서 엮어온 세월이
남다르게 오래되어 보인다.
오래된 것은 낡아보이긴 하지만
대신 오래 된 것은
어느 날부터 그곳에서 흐름을 멈추고 쌓이기 시작한
두터운 시간의 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간은 속절없이 가는 것 같지만
때로 걸음을 멈추고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시간이 오래 머문 곳에선 우리의 시선도 잠시 머물다 간다.
우리의 시간도 잠시 그곳에서 쉬었다 가는 것이리라.
그렇게 오래고 낡은 것은
한시도 쉴 수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던 우리의 시간이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의 자리이기도 하다.
산의 골짜기엔 대부분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른다.
오랫동안 빗소식을 듣지 못한 골짜기엔
언젠가 딛고 갔을 물의 발길을 따라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 길의 흔적 위에 오늘 물은 전혀 없고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만 흐르고 있다.
비가 흐를 때 물의 치맛자락을 잡고 흘러내린 것인지
작은 바위 하나가 그때의 물길 한가운데 서 있다.
아마 골짜기가 가진 물의 기억도
지금은 거의 모두 지워졌을 정도로 희미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충분히 비가 오고 온산이 흠뻑 젖으면
간만에 또 골짜기에 물줄기가 흐르면서 발자국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희미해졌던 물의 기억도 선명히 살아날 것이다.
그때면 후둑후둑 골짜기를 채우는 빗소리는
물의 기억을 일깨우는 주문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지상으로 가지를 뻗어 높이 자란다.
아니, 나무는 손으로 땅을 움켜쥐고
물구나무 서듯 다리를 하늘로 뻗는다.
그녀가 산길을 오르다 전화를 받는다.
딸의 전화이다.
응, 딸! 자기 지금 어디야.
그녀에겐 딸이 이제 사랑하는 연인이다.
아니, 피부가 왜이래.
“아직 쌀쌀해서 그런 가봐.
소름이 마구 돋네.”
아니, 소름돋은 나무가 있더니
그럼 넌 추워서 온몸이 이렇게 푸르딩딩하게 된거니?
“아니야, 난 슈렉 나무야.”
산길을 내려가던 그녀를
버들강아지가 불러세웠다.
그녀를 불러세운 버들강아지가
꼬리를 세우고는 반갑다고 흔든다.
새재고개까지 올라가는 길과
새재고개에서 숲속을 걸어 내려오는 길은 괜찮은데
곧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 나온다.
그 길부터는 길가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다.
대부분 음식점이다.
콘크리트 길은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다.
발바닥이 아픈 길이 길고 오래 계속된다.
그런 길을 내려가다 보니
물가의 둑 위에 늘어선 단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선 단지 속에 들은 것들이 물소리에 익어갔을까.
개울물 소리에 익은 고추장이며 된장은 맛이 남다를까.
돈맛을 보고 나면 어디서 익히나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길말고 사람들 못다니게 막아 놓은 임도가 하나 있는데
다음에는 몰래 그 길로 가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겨울에 물을 뿜어 올려
얼음탑을 만들어 놓았었나 보다.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형상이 마치 가는 겨울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이빨을 세우며 입을 벌려 오는 봄을 위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봄은 겨울의 으르렁대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점점 산속 깊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제 운길산역이 보인다.
가볍게 걷기에는 좀 멀다 싶었다 보다.
그녀가 한마디 한다.
“저기가 엿같은데.”
많이 힘들었는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역도 보이는데 왠 욕이냐.
하지만 모른 척하고 나도 그냥 거들어 주었다.
“그래 맞다. 저기가 정말 엿같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졸지에 엿같은 역이 되버린 운길산역엔
역내에 구내매점이 있다.
구내매점에서 컵라면 하나씩 먹고, 캔맥주도 하나 곁들였다.
수퍼 가격으로 판매하는 아주 저렴한 매점이었다.
운길산역에서 전철타고 다시 도심역으로 돌아온 뒤
그곳에 세워둔 우리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철을 타고 가며
도심까지 단 두 정류장 거리인
정말 교통 좋은 곳이라고 낄낄거렸다.
집에 와서 다시 한 잔하고 정신없이 뻗어서 잤다.
***이 글의 1편
봄을 찾아서 – 덕소의 새재고개 넘어 운길산역까지 걷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