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을 때는 아무리 흔해도 흔하질 않다.
나에겐 그런 경우의 한가지 예가 산수유이다.
내가 산수유를 처음 접한 것은
지리산 자락의 어느 산수유 마을에서 였다.
한동안 내게 산수유는 그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귀한 나무였다.
산수유를 모를 때였다.
그런데 그 나무를 알고 나자
산수유는 의외로 흔한 나무가 되어 버렸다.
서울의 여기저기서 산수유를 만날 수 있었고,
가까운 이천이나 양평에도 산수유 마을들이 많았다.
심지어 우리 집 바로 옆에 생긴 놀이터에도 산수유가 심어져 있었다.
산수유는 그렇게 흔하게 내 곁에 있었으면서도
한동안 지리산 자락의 어느 마을을 가야 만날 수 있었던 나무로
너무 멀리 고립되어 있었다.
꽃을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된 지금은
어딜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어린이대공원에 갔다가 그곳에서도 산수유를 만났다.
흔한 나무가 되었어도 반가움은 여전했다.
아직은 산수유 꽃이 필 때가 아니지만
식물원에서 가꾼 산수유 분재가 꽃을 노랗게 피운채
나를 맞아 주었다.
이곳 식물원에선 동백 분재가 매년 예쁜 꽃을 선사하는데
원래는 그것을 보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산수유에 눈을 뺐겼다.
바깥은 아직 겨울 냉기가 깨끗이 가시질 않았지만
식물원 안은 후텁한 기운으로만 보면 거의 초여름에 가까웠다.
인공의 기운이긴 하지만 그 온기를 타고
산수유 꽃이 절정에 올라 있었다.
안의 산수유는 밖의 산수유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밖의 산수유는 꽃이 피면 봄을 불러온 느낌인데
안의 산수유는 꽃에 봄을 아주 조금씩 담아놓은 느낌이 난다.
꽃에 담아 내게 내민 산수유의 봄이 정갈했다.
식물원을 나와 어린이대공원 바깥을 돌아보다 다시 산수유를 만났다.
이제 몽우리가 잡혀 있었다.
찍어놓은 옛날 사진들로 짐작해 보자면
이달 하순쯤 활짝 필 것 같다.
지금은 노란 색 망울들이 성글게 뿌려져 있지만
곧 노란 빛으로 좀더 진하게 텅빈 허공의 화폭을 채울 것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곧 세상에 풀어놓을 꽃들을
보자기에 잘 싸서 들고 있는 듯하다.
바깥의 산수유도 봄을 꽃에 담아서
우리에게 내밀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꽃이 활짝 피면 그때는
꽃이 봄에 조금씩 담겨있다기 보다
꽃이 불러온 봄이 나무에 가득한 느낌이 날 것이다.
아마도 충만함에서 큰 차이가 있을 듯 싶다.
산수유의 봄맞이는 가지 끝에서 뿐만이 아니라
허리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허리춤에서 슬쩍 꺼내주는 은밀한 마음 같다.
그 마음 내가 받았다.
망울이 잡혔을 때 꽃앞에 서서 얼굴을 익혀두었다가
일주일이나 열흘 뒤에 다시 그 자리에 서보는 것도 느낌이 좋을 듯 싶다.
일주일이나 열흘 뒤의 그 자리에선
마치 불꽃놀이하듯 꽃들이 펑펑 터지고 있는 느낌이 나지 않을까.
노랗게 터질 산수유의 봄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축포를 준비 중이었다.
2 thoughts on “안의 산수유, 밖의 산수유”
허리춤에서 슬쩍 꺼내는 봄마음이 노란별처럼 반짝거립니다.
폭죽처럼 터지는 봄의 소리들…
어딘가 숨어 있던 혁명군처럼 봄꽃들은 함성처럼 피어나는군요.
평창입니다.
원주까지만 해도 길가로 눈의 흔적도 보이지 않더니
이곳 평창에 오니 산들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어제 밤에 나갔더니 바람끝의 냉기가 여긴 여전히 한겨울이더군요.
오늘 오대산 월정사나 대관령 쪽으로 가보려 하는데 봄을 찾다 말고 좋은 겨울 풍경을 찾아다니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겨울나라로 찾아와 쌀쌀한 냉기를 호흡하며 돌아다니는 재미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잠깐이지만 어젯밤에는 눈까지 흩뿌렸습니다.
딸의 맥북을 들고 왔는데 창으로 들어온 아래쪽의 눈덮인 산을 내려다보며 맞는 아침이 아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