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있는 풍경 – 이상열의 그림 세계 – 지상 전람회 셋째날

지상 전람회 셋째날

이른 가을 – 감나무
Oil on Canvas
53.0*45.5cm(10F)
2007

가을은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으로 온다.
이른 가을은 그 첫 걸음이다.
가을의 그 첫 걸음엔
떠나는게 아쉬워 발목을 떼지 못한
진초록빛 여름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그래서 가을이 우리 곁으로 그 첫걸음을 들이밀었을 때,
감나무에선 색이 붉은 감이 끝자락의 여름과 스친다.

초가을 – 감나무
Oil on Canvas
62.5*53.0cm(15F)
2007

초가을은 가을의 첫번째 걸음이다.
이제 막 발끝을 들이민 그 가을은
붉은 색으로 점점이 물든 감에만 살짝 걸쳐 있다.
아직은 여름의 끝자락이 남아있어
집들은 여전히 녹빛이다.
여름으로 보면 떠나기 전
잠시 가을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시기이다.

붉은 지붕 위의 감나무
Oil on Canvas
53.0*41.0cm(10P)
2007

가을이 두 걸음을 떼면
감나무가 빨갛게 익은 열매를 가지 끝에 매달고,
가을을 깊숙이 불러들인다.
그러면 그 작은 감으로 세상이 붉게 물든다.
심지어 지붕까지도 붉게 물든다.
지붕의 붉은 색은 누군가가 칠해놓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붉은 색에 가을이 물드는 것은
지붕 위의 붉은 감이 가을을 불러들였을 때 뿐이다.

만추 – 감나무
Oil on Canvas
72.7*53.0cm(20P)
2007

가을이 세 걸음을 떼어놓으면 그 자리엔 늦은 가을이 있다.
늦은 가을의 감나무는 가지의 열매로만 가을을 밝힌다.
잎을 털어낸 빈가지 끝에서
빨갛게 익은 감이 저 홀로 가을을 담고 있다.
그렇게 가을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으로 감나무 곁을 지나간다.

배나무집 설경
Oil on Canvas
53.0*45.5cm(10F)
2007

이상열의 「은행나무집」에선 집밖의 은행나무가
집을 노란 가을로 물들인다.
이상열의 「감나무집」에선 집안의 감나무가 가지를 뻗어
집밖으로 붉은 가을을 내걸어 놓거나
혹은 집밖의 감나무가 담을 넘어 들어가
집안을 붉은 가을로 물들인다.
나무는 그렇게 가을로 집을 물들이기도 하고,
또 가을을 집밖에 걸어두기도 한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이상열의 배나무집엔 눈이 온다.
눈이 온 날,
그 흰색에 뒤섞여 집과 배나무는 하나가 된다.
겨울 추위는 그렇게 하얀 포옹으로 넘겨야 하리라.

배밭 설경
Oil on Canvas
53.0*45.5cm(10F)
2007

겨울은 그 추위를 생각하면
모든 나무에게 고난의 계절이다.
배나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나무에게 그 고난의 계절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은
봄에 피워올릴 하얀 배꽃의 꿈이다.
눈이 내린 날,
이상열의 겨울 배밭은
그 꽃의 꿈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다.

배밭 과수원
Oil on Canvas
162.0*112.0cm(100P)
2007

이상열의 그림 속에선
배나무의 봄으로 시작의 길이 열리더니
그 길에서 복숭아 나무와 사과나무,
그리고 감나무, 은행나무, 배나무가 그 계절에 엮이면서
나무들의 사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의 사계를 다 돌아나왔을 때,
나는 다시 봄의 배밭 과수원에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김동원이 묻다:
“우리가 산과 들에서 만나는 나무와
당신의 그림 속 나무는 무엇이 다른가?”

이상열이 답하다:
“내가 나무를 그릴 때,
나는 나무를 그린다기 보다 화폭 속에서 나무를 키운다.
내가 손끝으로 밀면 그때마다 나무가 가지를 뻗고 그 가지 끝에서 꽃을 피운다.
또 때로는 그 가지 끝에서 과일이 영글기도 한다.
나는 때로 노란 물감을 풀어 흘리고, 때로 붉은 물감을 풀어 흘린다.
나의 화폭 속에선 나무들이 그 물감을 자양분으로 삶을 키운다.
산과 들의 나무는 대지가 키운다.
대지에 그 뿌리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나무의 그림을 그릴 때
그 나무는 내 가슴을 대지로 삼고,
그곳에 뿌리를 둔다.
내가 나무의 그림을 그릴 때
나를 움직이는 힘은
내 스스로 대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일 것이다.”

김동원이 생각하다:
그렇다면 당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나무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나무가 슬그머니 그들을 대지로 삼아
그들의 가슴으로 뿌리를 내리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그림 속 나무는 그리는 자와 보는 자에게
그들의 가슴을 나무의 대지로 눕힐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신의 그림 앞에선 사람들이 모두 나무의 대지가 된다.
(2008 구상대전 이상열 도록의 해설)

**블로그에 그림 전시를 허용해주신 이상열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전람회의 첫째날과 둘째날 전시 보기
나무가 있는 풍경 – 이상열의 그림 세계 – 지상 전람회 첫째날
나무가 있는 풍경 – 이상열의 그림 세계 – 지상 전람회 둘째날

4 thoughts on “나무가 있는 풍경 – 이상열의 그림 세계 – 지상 전람회 셋째날

  1. 나무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나무가 있는 풍경’은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뭉툭뭉툭 화폭 속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 중에 ‘나무’를 그리는 이상열 화백님, 그리고 나무의 해설을 기막히게 써 내려 간 동원님, 참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나무’입니다. 나무사랑, 그 사랑을 놓치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1. 조금 안타까운 면도 있어요.
      그림은 원화를 직접 봐야하는 것이니까 말예요.
      그래도 슬라이드 필름을 직접 스캔한 것이라
      질은 상당히 좋은 것이랍니다.

  2. 저는 전람회에 가 본 적이 없고 예전에 호암 미술관에서 물방울 그림을 보고
    무척 감탄했던 것이 그림을 본 기억의 전부 같습니다.
    지상 전람회와 해설을 공짜로 보니 죄송한 맘이 살짝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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