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강아지가 피었다.
버들강아지가 피었으니
그 버들강아지가 피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때로 내게 필요한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버린다.
버들강아지에 물이 올랐다.
요건 좀더 낫다.
요 말은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요 말은 뿌리로 하여금 땅속의 물을 불러모으게 만들고
그 물은 가지 속의 물관을 통하여 버들강아지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버들강아지는 그 물을 마음껏 들이킨다.
그렇게 물을 들이키고는
온몸이 물의 느낌에 물든 강아지가 바로 버들강아지이다.
하지만 나는 요 말도 버린다.
느낌은 좋지만 너무 흔한 말이 되어 버렸다.
때로 말을 버려야 말을 얻을 수 있다.
말을 버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가 말을 갖고 있다기 보다
말에 묶여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말을 버리려면 나를 묶고 있는 말의 구속을 풀어버릴 수 있어야 하고,
말의 구속을 풀었다면 그 다음엔 과감하게 그 말들을 버려야 한다.
말을 버리자
버들강아지가 비스듬히 기운 오후의 햇볕을 타고
어지럽게 얽힌 가지 사이로 일제히 날아오른다.
날개도 없는 것이
몸을 싸고 있는 부드러운 솜털의 부력으로
지상의 중력을 가볍게 털어낸다.
지상엔 봄기운이 몰려와
벌써 발목까지 차오르며 찰랑대고 있었다.
4 thoughts on “버들강아지 날다”
봄이면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피리 만드는 재미도 덤으로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진달래꽃잎 따 먹고 버들피리 불던 그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순이는 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 친구들 중에도 순이가 여러 명 있었죠.
우린 그 버들피리를 호디기라고 불렀어요.
말을 버리자, 오늘 화두로 삼으려고 합니다.
말을 버리면 그동안 가두어 놓았던 말들이 제 날개를 찾아 훨훨 자기 길을 향해 날아오르지 않을까 싶어요. 버들강아지를 향한 단순한 수사 한 마디가 저들의 복슬거리는 솜털 하나만도 못한 표현이 아닐까…
항상 버리고 비워내는 작업이 가장 어려운 거 같아요.
특히 말이 더더욱 그래요.
자연으로 가서 보는 작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인 듯 싶구요.
시집을 한 권 읽고 있는데 만화의 말풍선을 꼬챙이로 모조리 터뜨리는 장면이 나왔어요. 알고보면 우리가 자연 앞에 섰을 때도 이미 말이 갇혀있는 말풍선이 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