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없고 한적할 때 찾아갔던 곳이
갑자기 유명세를 타면서 사람들로 북적일 때가 있다.
내겐 그런 경우의 한 예가 동해의 정동진이다.
그곳이 유명해진 다음,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이곳이 예전에 와본 곳이 맞나 싶었다.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두 해만에 다시 찾은 강화의 고려산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3년전에 아이 둘과 어른 다섯이 일행이 되어 그 산을 찾았었다.
나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다니는 사람들이어서
아침 예배를 드린 다음에 서울에서 출발했는데도
여유롭게 산에 오를 수 있었고,
산에서 내려온 뒤에 동막해수욕장까지 들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진달래 축제란 것이 없어서
차를 백련사 턱밑에 댈 수 있을 정도로 한가했던 기억이다.
두 해 전에는 청련사로 갔었는데
그때도 산이 붐빈다는 느낌은 갖지 못했다.
여전히 산능선의 길은 흙길 그대로였다.
그때도 산에 올랐다 내려와선
다시 낙조마을이라 불리는 바닷가의 한 마을에 들렀고,
그곳에서 지는 해와 마지막 눈인사를 나누었다.
올해 가보니 붐비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능선을 따라 흐르던 흙길도 목책길로 바뀌었다.
비가 왔을 때 상당히 미끄러웠던 그 길이
걷기에 수월해진 것은 좋았지만
이리저리 휘어지며 발밑에 밟히던 옛길의 맛에는 못미쳤다.
옛날의 흙길 옆에서 바라보던 진달래는 지나가다 함께 하는 꽃 같았는데
목책길에서 바라보는 진달래는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싫어서 목책 전망대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았었다.
진달래는 그대로인데…
길이 바뀌고, 북적이는 인파가 더해지면 진달래의 느낌도 바뀌는 것 같다.
사람이 많아지면 무엇이나 함께 한다는 느낌으로 곁에 두기는 어려워진다.
사람이 많아지면 대개 세상의 무엇이든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군락을 이룬 진달래의 위용은 대단해서
그렇게 북적대며 몰려드는 사람들을 거뜬히 감당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나는 그곳의 진달래들 속에서
쉼없이 꽃들과 눈을 맞춰가며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4 thoughts on “강화 고려산, 2006 그리고 2009”
고려산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이 곳을 통해서
벌써 몇 번을 갔다 온 느낌이예요.
2, 3년 전 이리저리 휘어지며 밟히는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제대로 가봤어야 하는건데..
사람들도 다 내 맘 같아서 좋은 곳에 가서 아름다운 것 보고픈 마음은 한 가지일텐데.
세상에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결국에는 꼭 장사터가 되는 것이 아쉬울 뿐이예요.ㅜㅜ
봉평에 있는 이효석 생가랑 문학관을 돌아보는데… 그냥 아무 것도 조성되지 않고 저기가 원래 이효석이 살던 집이었데 하면서 스치던 시절이 정말 문학적이었지 않았을까 싶더라구요. 생가 주변을 음식점이 둘러싼 지금의 동네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어요. 먹고 사는게 웬수죠, 뭐. 이효석이 무슨 음식점 홍보 요원으로 나선 것 같았다는… ㅋㅋ
실망하진 마세요. 고려산 옆에 혈구산과 퇴모산이라고 있는데 여전히 사람들 발길이 뜸한 예전 상태로 남아 있는데다가 진달래도 많으니까요. 다음에 기회되면 그곳으로 가면 될거 같아요. 그 산타고 가면 외포리에 닿는다는데 그것도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그리로 가자구요.
유명해진다는 것은 이제 예전의 모습과는 ‘작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버려두면 좋을 것을… 버려두는 것이 자연을 살리는 길인데요… 지구상에 딱 한 곳, 개방이 되지 않은 ‘북쪽’을 향한 마음도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사람이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어디나 할 것 없이
장사터가 되버리는 것 같아요.
심지어 문학이나 음악, 예술로 모여도
사람이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문학과 예술은 슬쩍 뒤로 밀려나고
장사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 어쪄랴 싶어도 좀 아쉽기는 해요.
한적한 시절이 그리운 것은
먹고사는 것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듯한,
그래서 일상을 멀리 벗어난 듯한 그 느낌이 그리운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이런 말할 처지는 못되요.
산에서 내려오다 한잔 걸치고 내려왔거든요.
있으니 또 그것대로 좋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쉬워하고… 많이 이율배반적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