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6월 28일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보리밥을 했다.
고소하고 맛있다.
사실 보리밥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쌀이 섞여 있는데다가
보리도 그냥 보리가 아니라 찰보리이다.
그냥 보리보다는 많이 찰지다.
물론 그래도 보리는 보리다.

어렸을 적 참 어지간히 보리밥을 싫어했었다.
보리밥을 싫어한 것은 다 커서도 마찬가지여서
어쩌다 사람들이 보리밥집으로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간다고 하면
먹을 것도 많은 세상에
도대체 왜 돈주고 보리밥을 사 먹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보리밥은 쌀밥보다 더 비싸기까지 했다.
같은 값을 주고 먹는다 해도 이해가 안가는데
값이 더 비싸니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보리밥이 이제는 고소하고 맛있다.
한때는 쌀밥처럼 입에 붙지 않고
입안을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듯한 그 느낌도 무척이나 싫어했었는데
이제는 이빨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녀석들을 추적하여 한곳으로 몰아넣고
고소하게 씹어주는 것도 재미있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옛날엔 그렇게 보리밥을 싫어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의 그 보리밥은 그냥 밥이 아니었다.
그건 부자들이 먹는 하얀 이밥의 대척점에 엎드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밥이란 상징을
무슨 굴레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밥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가난은 항상 멸시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난 보리밥 자체보다
보리밥에 덧씌워진 그 가난의 상징이 싫었던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오랫동안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못된 짓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보리밥을 먹는 데 약간의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이제 보리밥에 대한 그 완강하던 기피증이 이완된 것을 보면
이제 나도 세상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
부자로만 치닫고자 했던 한 시대가
보리밥에 덧씌웠던 그 상징의 질곡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는가 보다.
그런데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은 참 씁쓸한 시대이기도 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부자를 꿈꾸고 있고
또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한 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보리밥이 묻는 듯 했다.
“우리의 가난엔 언제쯤 자리를 잡아줄꺼니?”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 세상엔 가난에 내줄 자리가 없는가 보다.
보리밥은 겨우 자리를 찾았지만
보리밥이 질곡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가난은 여전히 자리가 없다.

8 thoughts on “보리밥

  1. 흰쌀밥이 최고였는데 언제부턴지 보리밥이 더 비싸졌더라고요.
    벤또에 보리밥을 의무적으로 섞어야 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식단이 건강식이라고 하는 걸 봐서는
    정신적 건강을 더 살찌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호박잎에 보리밥 한술 올리고 된장에 풋고푸 찍어 먹으면 최곱니다.

    1. 가난은 가난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치를 가지면 좋으련만 가난과 부자를 대립구도 속에 세워놓고 가난을 몰아내야할 대상으로 정하면 그때부터 가난은 자리를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 통에 가난의 편으로 분류된 보리밥도 함께 가치를 얻지 못한 것 같구요.
      과거의 가난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이제는 보리밥 자체의 가치를 되찾아가고 있는 시대가 아닐까 싶어요.
      말씀하신 그 식사는 듣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합니다.

  2. 시골에 살면 보리밥이라도 밥은 굶지 않는데
    인천은 공업도시라 안그랬나봐요.
    제 시어머님께서는 예전에 한달분량의 밀가루 한포대를 사다놓고
    모든 끼니를 수제비로 떼우셨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울신랑 수제비하면 질색을 하더니 요즘은 잘 먹더라구요.
    아마도 지금은 수제비한테 조금은 미안할듯 하지요..^^

    얼마전에 누군가가 오늘이 있기까지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며 어쩌고 하는데… 참….
    그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가난이라는 말이 시궁창에 나뒹구는 느낌이었어요….
    선을 분명하고 진하게 긋는 듯한 느낌이요…ㅠ.ㅠ

    1. 저도 수제비를 아주 싫어했어요.
      거의 보리밥이나 진배없이 싫어했었죠.
      수제비는 지금도 별로 좋아하질 않아요.
      가끔 과거가 현재를 오래도 물고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종종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이 피폐해 보일 때도 있고
      가난한 삶이 오히려 풍족해 보일 때가 있는 듯 싶어요.
      가난한 삶 속의 그 빛나는 가치에 대해
      좀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지금보다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다음 번엔 “가난하지만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예요.

    2. ohngsle님/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져서 아주 힘들더라구요.
      일 땜에 안만나고 살 수도 없구…ㅜㅜ

      eastman님아, 나는 지금도 보리밥, 수제비 다 싫어해.
      난 어릴 때 국수도 안먹겠다고 찔찔 짰거등.
      그때마다 엄마가 나만 따로 밥해주셨어.
      잘 먹지도 않는 애가 한끼 아무거나 덥석덥석 잘 먹어주면 좋은데
      안먹고 크게 울지도 못하고 찔찔거리니까 밥해주시더라구.
      나는 당신 땜에 국수 먹게 된거나 진배없지.
      우리 시어머님은 내가 보리밥 싫어한다고 생각하시잖아.
      가끔 보리밥 해주시면 그거 잘 안먹는다구..ㅋㅋㅋ
      이젠 잘 먹는데도 말이야.

    3. 그대는 요즘 Wise Beauty만 드시잖아. ㅋㅋ
      아름다움이면 족한데 현명함까지 갖추려 드시다니… 너무 욕심이 많어.
      난 약간 멍청한 듯한 아름다움이 좋더라.

    4. wise beauty, 현미? ㅋㅋ
      난 현미밥 먹고 싶은데 밥을 따로 해야 해서 여간 귀찮은게 아니네.
      나, 완전 멍청해서, 쫌 아름답지 않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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