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 소설은 그나마 문자로 이루어져 있어
어렵긴 해도 읽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언젠가 발레에 대한 얘기를 듣다보니
발레의 동작도 수화처럼 그 자세를 통하여 어떤 말을 표현한다고 했다.
가령 두 손을 겹쳐 가슴 위로 얹으면 사랑을 뜻한다는 식이다.
물론 말과 동작이 결합되는 이런 식의 약속된 자세는
손에 꼽을 정도로 몇 개에 불과했다.
때문에 발레의 동작을 모두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대 무용은 더더욱 그런 듯 싶다.
때문에 춤은 쉽게 읽히질 않는다.
그 점에서 보면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분야는 음악이다.
음악을 듣고 슬프다, 기쁘다, 놀랍다와 같은 감정은 대충 집어낼 수 있어도
얘기를 길어올리긴 대단히 어렵다.
그냥 즐기면 되지 뭘 꼭 읽어내려고 하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읽어내면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간 남다른 느낌의 감동이 있다.
시를 읽던 버릇 때문인지 무엇을 마주하던지 자꾸만 그것을 읽으려 든다.
8월 25일 화요일, 홍대앞 놀이터에서 사운드박스의 공연을 보고 있을 때도
난 탭퍼 신혜련의 춤을 즐기면서 한편으로 그녀의 춤을 읽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무대는 사방 1m 정도의 푸른 짐받이.
무대는 초라하지만 그녀의 춤은
그 초라함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화려하다.
그녀는 발로 그 무대를 두드린다.
그녀의 그 작은 무대는 그녀가 딛고 선 작은 대지이다.
서울의 이 너른 대지에서 그녀는
한 뙤기의 땅을 잠시 빌려 그녀의 무대로 삼는다.
그리고는 그 대지를 발로 두드린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란 말이 있지만
그녀가 아무리 두드려도 땅은 열리지 않는다.
대신 두드릴 때마다 대지는 그녀에게 소리를 내준다.
발은 대지의 소리를 리듬에 실어 일깨운다.
대지는 굳어있는 것 같지만
그녀가 똑똑똑 발로 두드리면 소리의 리듬으로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무대는 좁고도 넓다.
크기로 보자면 손바닥만해서
그 속에 꼼짝없이 갇힐 것 같은데
그녀에게 그 좁은 무대는 넓은 대지이다.
그녀가 그 넓은 대지를 마음껏 달린다.
그렇게 그녀의 대지는 몸을 누일 수도 없을 정도로 협소하지만
그녀는 그 좁은 대지를 끝없이 달릴 수 있다.
그녀가 달릴 때, 나는 잠시 그녀가 대지에서 발을 휘저으면
그 대지에서 소리의 주문이 일고
그 마법의 주문으로
발밑에 푸른 초원을 펼쳐진다는 환상에 젖어들었다.
기타 속에 소리가 살듯이
그렇게 대지에도 소리가 살고 있다.
우리는 대개 그 소리를 만나기 어렵다.
그 소리는 거의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며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굳고 단단한 대지를 골라 발을 구르면
누구나 그 소리를 불러낼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불러낸 소리엔 짜증이 묻어난다.
그래서 시끄럽다.
대지의 소리를 불러내 함께 놀려면
리듬을 아는 발이 필요하다.
그녀는 대지의 소리를 리듬에 얹어 불러낼 수 있는 발을 가졌다.
대지의 소리는 그녀가 발을 구르면 주저없이 튀어나와
그녀와 어울러 즐겁게 춤을 춘다.
그녀가 좁은 대지 위에서도
끝없이 달릴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발구르는 소리로 달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는 발을 굴러 소리를 낼 수 있는 작은 공간이면
얼마든지 끝없이 달릴 수 있다.
대지는 그녀가 발을 구를 때마다
소리를 그 발밑에 깔아주는 소리의 샘이 된다.
그 소리의 샘에서 소리가 솟으면
그 소리로 목을 축인 푸른 초원이
우리의 환상을 빌려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달리기는 힘겨운 법.
그녀는 잠시 대지 위에 앉아 쉬기도 한다.
잠시 쉬어도 힘겨우면 아예 대지를 깔고 앉아서 쉰다.
그녀가 쉬는 시간의 빈틈은 음악이 메꾸어준다.
그녀는 달릴 때는 음악에 몸을 싣고 달리고
쉴 때는 음악에 기대어 쉰다.
그렇게 쉬다가 그녀는 다시 슬그머니 일어선다.
그녀가 쉴 때면 우리도 그녀와 함께 잠시 쉬는 느낌이다.
우리는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그녀를 기다려준다.
처음에 그녀의 춤은 그냥 춤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춤은 춤이 아니라 연주이다.
그녀는 발을 굴러 선율을 연주한다.
기타가 먼저 어떤 선율을 연주하면
그녀가 그 선율을 그대로 받아 발로 연주를 한다.
기타와 그녀의 발은 선율을 서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똑같이 복제한다.
기타와 그녀, 그 둘의 주고 받기는 한참 동안 계속된다.
그녀가 기타에게 몸짓을 보낸다.
“좀더 어려운 거 없어?”
기타가 결국은 손을 든다.
탭 댄스가 춤이 아니라 연주란 것을 보여준 그녀가
다시 무대에서 그녀의 춤으로 돌아간다.
연주일 때는 발을 굴러 일으킨 음이 부각되고
춤일 때는 그녀의 동작과 발밑에서 울려나는 발소리가 한몸으로 뒤섞인다.
춤일 때 우리는 굳이 발소리로 만들어낸 음을 구분하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이 대지에 뿌리는 씨앗도
대지를 두드리는 몸짓일지 모른다.
씨앗이 두드리면 대지는 물과 영양분을 내준다.
풀과 나무는 그렇게 대지를 두드리고 그곳에서 생명을 연다.
땅은 두드린다고 열리는 법은 없지만
그러나 두드리는 것들이 스스로 열릴 수 있도록 해준다.
생명을 구하는 몸짓에는 대지가 그렇게 반응하지만
그러나 생명과 먼 단단히 굳은 대지에서도
탭퍼가 발을 굴러 두드리면 그 발앞에서 소리가 열린다.
대지는 스스로를 열어주는 법은 없지만
두드리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열릴 수 있도록 해준다.
대지는 알고 보면 두드리면 언제나 열린다.
두드리면 모든 대지가 열린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사실 초원에 가선 달릴 필요가 없다.
탁트인 초원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우리의 마음이 이미 그곳을 마음대로 달려간다.
도시는 그런 초원을 상실한 공간이다.
도시에선 달릴 수가 없다.
푸른 초원에서의 달리기를 꿈꾼다는 것은 도시에선 불가능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달리고 싶다.
탭퍼 신혜련의 춤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도시에서도 사방 1m의 작은 공간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달리는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도시에선 초원을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초원을 발아래 펼치면서 달리면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
그녀가 경쾌한 말발굽 소리를 일으키며 땀에 뒤범벅이 되어
푸른 초원을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녀를 성원해주고 싶다면
싸이월드에 개설되어 있는 사운드박스의 클럽을 찾아가면 된다.
주소는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390339 이다.
6 thoughts on “탭퍼 신혜련의 탭 댄스 – 사운드박스의 공연 가운데서”
어렸을때 탭댄스 추는 것 보고 집에서 나름 춤췄던 기억이 생각나네요.
소리가 안나는 운동화니까 아버지 구두 신고… ㅋㄷㅋㄷ
6개월 전이네요. 전 홍대 가면… 별로 만날 기회가 없어서…
담에 가면… 삼각대 들고 가봐야겠습니다. ㅎㅎㅎ
거의 매일 공연을 해요.
홍대앞 놀이터에서…
그냥 시때 맞추지 않아도 거의 구경할 수 있다는.
김.동.원 님…..
정말 감동입니다 ㅠㅠ
저는 동원님처럼 글 재주가 없어서 이 감사하고도 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그럼 서로 주고받았네요.
저도 춤보면서 감동받았거든요.
전에는 카메라가 밤에 좀 약해서
제대로 느낌을 담아내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좋은 카메라를 장만했어요.
언제 다시 한번 카메라에 담으러 갈께요.
조그마한 무대에서도 신내린듯 춤을 추네요.
저도 한때는 나이트 무대를 휘젖고 다니던 때가 있었지만
졸업하니까 골방이 점점 좋아지더라고요.
익명을 더 선호하는 것이 젊음과 멀어지는 증거 같습니다.
넓은 무대였으면 감동이 덜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 작은 무대를 벗어나는 법이 춤을 추더라구요.
한번 보러오세요.
보면 반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