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적가리

Photo by Kim Dong Won
2003년 10월 31일 양평의 소리산 근처 마을에서

변화가 도시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실 농촌도 그 모습은 옛날과 많이 다르다.
내 고향만 해도 내가 자랄 때는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지만
지금은 한 채도 남아있질 않다.
그때의 기와집 자리에는 모두
살기 편한 요즘의 현대적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생활의 불편은 어디서나 감내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학교는 온통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학교의 옆쪽으로 커다란 방울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나
그것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농촌을 고향으로 둔 덕분에
유년 시절의 추억이 서린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질 못하다.
추수를 끝낸 논의 풍경도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에는 추수를 끝내고 나면
텅빈 논에 노적가리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었다.
노적가리는 볏짚을 높이 쌓아놓은 것이다.
추수한 뒤 그것 쌓는 것은 큰 재미였다.
우리는 바람이 불 때면
그 노적가리를 방패삼아 바람을 피하곤 했었다.
의외로 노적가리가 바람을 막아주는 뒤쪽은
따뜻했었던 기억이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면
우리도 바람을 피해 노적가리를 빙빙 돌며
우리의 자리를 바꾸곤 했었다.
어느 날 쥐 한마리를 쫓다가
그 쥐가 노적가리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그 쥐를 잡겠다고 노적가리에 불을 놓아
어른들께 크게 혼이 났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기계로 수확을 하다보니
추수가 끝난 뒤의 논에서도 노적가리를 거의 볼 수가 없다.
오래 전 양평의 소리산에 놀러갔다가
근처 마을에서 노적가리를 보았다.
예전에는 새로운 것에 많이 탐닉했었는데
나이들어 가면서 유년의 기억과 만날 때 즐거움이 크다.
내 유년의 기억이 오랫동안 그곳에서 숙성되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그 숙성된 느낌의 풍경이 농촌에서도 거의 대부분 지워져가고 있다.
점점 기억이 뿌리뽑혀 가는 느낌이다.

2 thoughts on “노적가리

  1. 사진으로나마 아주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입니다.
    겨울철 놀이터였는데 말이죠.
    새로운 것만 찾던 예전엔 몰랐는데 이제는 촌스런 모습을 볼수록 더 정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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