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에 들리고 곰소로 가다

원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머리 속으로 계획해 두었던 행선지는 유명산 정도였다.
가까운 인근의 산을 찾아가 간단하게 등산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아침 계획의 대체적인 내용이었고,
그 계획 속에서 가까운 산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유명산 정도였다.
하지만 간단하게 일을 보고
이제 차가 떠나도 좋을 시간이 되었을 때,
차는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좇아 이렇게 말했다.
“대천으로 가자.”
우리는 그곳을 대천이라기보다는 한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7월 14일 금요일, 우리의 한내 여행은 그렇게
내 마음의 흐름을 따라 시작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차는 경기도 퇴촌에서 강원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중부고속도로로 올라탔다.
겨우 한블럭을 달린 차는 동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뒤,
외곽순환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빗발이 차창을 두들겼다.
아주 오래 전 그녀와 나 둘이
지금은 없어진 용산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 한내로 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참 비가 많이 왔었다.
오늘 한내로 향하는 그녀의 얼굴에선
이빨이 모두 쏟아질 정도로
환한 웃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는 음악과 동행했다.
‘송골매’가 “처음부터 사랑했네”를 불러주었다.
‘체리필터’는 “오리 날다”를 불러주었다.
사랑하며 날아가란 뜻일까.

Photo by Kim Dong Won

서해대교를 지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잿빛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은 무엇인가를 쏟아낼 듯
잔뜩 웅크린 모습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러나 서해대교를 벗어나자 갑자기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마치 잿빛 하늘을 서울쪽으로 집어던지고
줄행랑을 놓는 기분이었다.
오래 전 둘이 서울을 떠날 때도 그랬었다.
먹구름을 서울쪽으로 던져버리고
우리는 한내로 달아났었다.
그날도 쨍한 햇볕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한내해수욕장.
그녀가 바닷가로 걸어간다.
그녀의 발자국이 그녀를 따라간다.
그 뒤를 내가 따라간다.

Photo by Kim Dong Won

파란 하늘과 구름이 북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 하늘이 몰려가서
저녁 때 쯤이면
잿빛 비구름의 북쪽까지 일거에 점령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Photo by Kim Dong Won

그녀는 신발을 벗고 한내의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녀가 말했다.
“왜 이렇게 허리잡고 사진찍는 줄 알아?”
그냥 포즈아냐?
“아니야, 허리가 어딘줄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그 말을 하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바다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Photo by Kim Dong Won

조개껍질엔 문양이 있다.
물결이 새겨져 조개껍질의 문양이 된다.
같이 살아가며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겨져
내가 너의 문양이 되고, 네가 나의 문양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오래 살다보면
네 속에서 내가 보이고,
내 속에서 네가 보인다.
사람들이 조개껍질에서 바다를 떠올리고,
바닷가를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조개껍질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다에 조개껍질 새겨져 있고,
또 조개껍질에는 바닷물결이 새겨져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닷물은 소라껍질을 적시고 내려가며
모래를 함께 가져간다.
바다가 모래를 파내간 자리는
색깔이 더 짙은 모래를 드러내며 금방 작은 길이 된다.
그 길은 소라껍질에게 다시 오겠다고 언약한 약속의 길이지만
바닷물은 올 때마다 길이 달랐다.

Photo by Kim Dong Won

한내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우리는 서로에게
오늘 우리 곰소에 가볼까 하고 물었다.
곰소는 황동규가 그의 시 <풍장> 속에서
통통배에 그의 시신을 실은 채
무인도로 떠났던 작은 항구이다.
황동규는 군산이 검색이 심하면 곰소로 가라고 했다.
그러니까 군산이 현실적 규제가 완강한 공간이라면
곰소는 그런 규제가 느슨한 공간이다.
우리는 그 곰소로 가고 싶었다.
가는 길에 차창으로 보니
구름이 산등성의 유려한 곡선을 타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하지만 잠시후
갑자기 굵은 빗발이 차창을 두들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구름이 방금 우리가 지나쳐온 한내쪽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우리는 또 비구름을 북쪽으로 내던져 버리고
남쪽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곰소염전.
소금밭에선 바닷물이 몸을 말린다.
바닷물이 몸을 다 말리면 흰색 소금이 된다.
그렇다고 흰색 소금옷을 물에 적신다고 다시 바닷물이 되기는 어렵다.
그때는 소금물이 된다.
바닷물을 그냥 바닷물로 남겨두고 싶다면
바닷물이 입고 있는 흰색 소금옷을
그냥 물에 젖은채로 투명하게 입고 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Photo by Cho Key Oak

그녀가 찍은 염전 풍경이다.
그녀는 소금창고 뒤쪽의 어지러운 현대식 건물들을 가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이 사진을 찍었다.
“음, 자세를 낮추면 뒤쪽을 가릴 수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면 둘이 서로를 마주했을 때는
둘 모두 자세를 낮추고 있는 셈이다.
오직 나에겐 네가, 너에겐 나밖에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서로의 뒤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너와 나를 어지럽힌다.
그녀가 자세를 낮추자
소금창고가 시선을 가득 채우고
염전 바닥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그것이 재미있어 보였던지 멀리보이는 산도 그것을 따라하고 있었다.
염전은 갑자기 그들의 거울이 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곰소항.
멀리 보이는 산자락 위로 구름이 탐스럽게도 피어올랐다.
바닷가에서 만난 한 어민의 말에 따르면
건너편은 고창 지방이라고 한다.
가장높은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그곳이 선운사가 있는 곳이라 일러주었다.
아저씨는 고창보다는 곰소가 있는 변산반도가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고 자랑했다.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인데 고창은 도립공원이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반대편의 고창에서 곰소쪽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끔 내가 서 있는 곳의 풍경을 멀리서 한번 바라보고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갑자기 또 굵은 빗줄기가 몰려왔다.
바닷가의 작은 쉼터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지나간 뒤
멀리 구름의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한움큼 바다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아마 그곳도 이곳과 다름없는 작은 항구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것은
지금 서 있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려는데 그 뜻이 있는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곰소항을 떠나 격포쪽으로 가다가
경관이 트이는 고개맡에서 차를 세웠다.
우리가 방금 서 있던 곰소항이 저만치 아득하게 보였다.
구름이 하늘을 치장한 항구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우리가 방금 전에 그 속에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궁항의 바닷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지이다.
그녀가 이번에도 바닷가를 맨발로 거닐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허리가 어딘지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채석강.
오래 전에 차를 몰고 채석강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어렴풋하다.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그곳에 갈 때의 기억 하나는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 채석강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길을 알려주던 그곳의 한 아주머니는
“그곳은 돌밖에 없는데 뭐하러 가노”라고 말을 했었다.
우리는 그때 “바로 그 돌보러 가는 거예요”라고 말을 했었다.
이번에는 채석강에서 둘이 함께 사진을 한장 찍었다.
사진을 들출 때마다 그곳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녀가 일몰의 바닷가에 앉아
길게 꼬리를 끌며 수평선으로 내려앉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한낮내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태양은
이상하게 수평선 아래로 몸을 감추기 직전만큼은
예외없이 태양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한다.
우리들이 일몰의 태양에 취하는 것은
사실은 그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짧은 눈맞춤의 시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태양과 눈맞출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짧게 눈맞추고
그 짧은 눈맞춤으로 우리는 그 밤을 황홀하게 잠들 수 있으며,
또 다음 날의 지리한 하루를 그런대로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우리의 삶이다.

4 thoughts on “대천에 들리고 곰소로 가다

  1. 우와~~넘 멋진 사진들이네요.^^
    통통이님 무지 행복하신 표정이 압권.^^
    뭐라고 하셨길래 저리도 행복하실까요.^^
    저도 곰소를 자주가는데 요즘은 통 못가봤네요.
    젓갈집,생선집,건어물집등 찍어보고싶은데.^^
    이번 여름휴가지는 만리포로 정해서 파도는 실컷 볼것같아요.^^

  2. 나는 이번 여행으로 하나의 획을 긋는 여행이 되었어.
    제2의 한내여행이었으며 거기에 곰소를 들른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지.
    아마도 황동규와 함께한 여행이어서 더욱 좋았을거야.
    황동규는 곰소도 그렇고 외옹치도 그렇고… 시의 무대가 되어주는 그곳의 정서가
    우리랑 넘 닮아 있어 더욱 그런 것 같어.
    황동규의 들꽃 사랑도 최근에 내가 좋아했던 것들인데 인경이 인도여행갈 때 선물로 주었지. 그 책을.
    이번 여행은 예전 황동규, 오규원, 이성복을 읊었던 시절이 떠올라서 더욱 좋았던 것 같어. 차 안에서 들려준 톡톡튀는 젊은 시인의 시도 빼놓을 수 없지.ㅎㅎ

    치열한 싸움끝에 얻은 결론,
    당신의 자유가 더욱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두 자유로와지게.

    1. 그 젊은 애는 김민정이다.
      소문에 의하면 상당한 미모를 자랑한다더군.
      어느날 모임에서 김민정이 시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만 나보고 미모순으로 시를 좋아한다고 내 취향을 탓하더군.
      곰소로 향할 때 내가 읽어준 김민정의 시구절 하나.
      “조심하세요
      박수가 마려운 심벌즈가 밤낮없이 손뼉을 찾아다니고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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