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란 사실은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다. 봄의 얼굴과 여름의 얼굴이 다르고, 눈이 왔을 때와 비를 뒤집어 쓰고 있을 때가 또 다르다. 같은 날 백담사를 들어가고 나오지만 들어가는 길에 눈에 띈 풍경과 나올 때 눈에 띈 풍경이 또 다르다. 분명 같은 길을 걸어 들어가고 나왔는데 나올 때는 다른 것들이 눈에 띄었다. 3월 8일, 오랫만에 찾았던 백담사행에서 나올 때 마주한 풍경들이다.
눈온 날, 눈은 바위에게 선글래스 하나 선물했다. 그런데 하얀 눈세상을 그렇게 시커먼 선글래스를 쓰고 보면 뭐가 제대로 보이겠나. 그러나 선글래스를 얻은 기쁨에 바위는 그런 것은 따지지 않았다.
인공의 하트 문양은 많다. 인공의 문양들은 자태가 매끄럽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자연산 하트 문양이다. 자연산이라 모양은 매끈하지 못하다. 하지만 살살 녹는 마음이다.
눈이 내린 날, 눈은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눈다. 대개는 흑과 백으로 나뉘어지면 그 둘의 사이에 일어나는 것은 싸움이지만 눈이 나눈 흑과 백의 세상은 오히려 아름다움의 구도를 만들어낸다. 백담사에서 나가다 바위를 둘러싸고 나뉘어진 흑과 백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눈은 어찌보면 흑과 백으로 맞서 싸우지 말고 아름다움의 구도 속에 공존하라는 언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그 흑과 백을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갈라 이해할 때 싸움의 원인을 둘쪽 모두에 두는 것은 반대이다. 난 그 싸움의 원인이 거의 보수쪽에 있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이다.
눈은 또 바위에 귀를 선물한다. 바위 하나가 귀를 쫑긋세우고 지나는 내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눈은 또 바위에게 충고하기도 한다. 허리의 살이 너무 쪘어. 허리는 이렇게 살을 빼야 하는 거야. 날씬하게. 바위가 전혀 들어줄리 없는 조언인데 내일 때마다 눈은 저럴 테지.
눈은 녹으면서 물이 되었고, 그 물은 또 거울이 되었다. 눈을 가지에 얹고 휘어진 나뭇가지들이 그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며 위아래가 서로 마주하는 데칼코마니 문양 하나를 선물한다.
날이 흐리면 산의 꼭대기는 하늘과의 경계를 뭉개고 만다. 평상시 경계를 분명하게 그으며 갈라서 있던 하늘과 산은 흐린 날엔 이어져 하나가 된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 벗어날 때 눈이 심하게 내리는지 산 정상이 흐릿하게 경계를 지우며 하늘과 하나가 된다.
약국과 수퍼를 겸한 백담사 앞의 버스 승차권 판매소에서 5시 55분쯤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차는 원래 5시 50분 차이지만 대개는 조금씩 늦는다고 한다. 차표를 끊어준 아주머니가 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건너가 서 있어 보라고 했다. 이번 차를 놓치면 그 다음 차는 7시 30분의 막차라는 언질도 잊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버스 정류장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에 몸을 싣고 곧바로 백담사에서 버스를 내렸지만 올라오는 길은 릴레이의 연속이었다. 아주머니는 동서울이라 적혀있는 버스를 타라고 했지만 내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내민 버스는 동서울이라 아니라 상봉을 행선지로 삼고 있었다. 그 버스는 원래 그곳으로 다니는 버스가 아니었다. 그 날 엄청난 폭설로 한계령 길이 막혔고, 그리하여 버스는 미시령 터널을 통하여 원래는 다니지도 않는 그 길을 가다 나를 보았다. 운전 기사 아저씨는 추운 겨울 날씨를 생각하여 일단 버스를 세웠고, 그리고는 나에게 버스를 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으로 다니지도 않는 버스를 타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버스 안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인제에서 나를 동서울로 가는 버스에 태워주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인제에서 내려 이제 버스 속의 승객은 둘이 되었다. 인제에서 버스를 바꿔타고 이제 막 버스가 떠났을 때 차창으로 내다 본 산자락엔 이제 저녁 어둠에 거뭇거뭇 덮여가고 있었다. 인제에서 나를 태워준 동서울행 버스는 온갖 곳을 다 들리며 동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였다. 아저씨는 동서울행 고속버스표를 끊은 내가 그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것은 엄청나게 지루한 일이며, 그래서 크게 손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아저씨는 홍천에서 다시 나를 동서울행 고속버스에 실어주었다. 나는 백담사 입구에서 인제로, 인제에서 홍천으로, 그리고 홍천에서 또 동서울로 버스를 갈아타며 서울로 돌아왔다. 갈 때는 한 방이었으나 올 때 나는 버스들의 릴레이에 편승하여, 재미나고 독특하게, 마치 릴레이 주자들이 터치하는 바톤처럼 서울로 돌아왔다.
갈아탄 버스가 홍천을 빠져나올 때 힐끗 시간을 보았더니 7시30분이다. 만약 내가 버스들의 릴레이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면 이제 백담사 앞에서 버스를 탔을 시간이었다.
갈 때는 백담사까지 2시간 10분 정도가 걸렸고, 올 때는 그렇게 버스를 바꿔탔는데도 2시간 30분 정도에 서울에 도착했다. 예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니 30~40분 정도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백담사와 속초가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러나 좋기로는 버스가 중간까지밖에 가지 않았던 초행길의 백담사가 가장 좋았다. 아마 그 전에 백담사를 찾았던 사람들이라면 아예 버스는 다니지 못했던 시절의 백담사를 더 좋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들어가며 만난 풍경은 다음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백담사 다녀오는 길 – 들어가는 길에 만난 풍경
2 thoughts on “백담사 다녀오는 길 – 나오며 만난 풍경”
역시 기사들도 VIP 손님을 알아보는군요.^^
그래서 백담사에서 동서울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갈 때는 두 시간만에 간 것 같구요, 올 때는 2시간 30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예전보다 1시간 정도 줄어든 느낌이었어요. 속초까지 2시간 30분 걸린다고 하더라구요. 춘천고속도로 때문에 시간은 엄청 절약이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