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사고 가장 먼저 찾았던 절이 백담사였다. 6km를 걸어들어 가야 하지만 당시엔 중간 지점인 3km까지 버스를 타고 갔었다. 나올 때도 3km 지점까지 다리에 쥐가 나도록 뛰듯이 걸어나와 다시 버스를 탔었다. 그 해가 2004년이었다.
그 뒤로 2005년에도, 2006년에도 백담사를 찾았다. 두 해 모두 백담사를 찾은 날 눈이 내렸다. 두 번 모두 버스를 타지 않았다. 아니, 버스가 다니질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 두었다가 올해 다시 백담사를 찾았다.
2010년 3월 8일 월요일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백담사행 버스의 시간을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10시 35분이었다. 머릿속에서 기다려야할 시간을 40여분이라고 계산해 냈고, 재빠르게 그 정도면 기다렸다가 갈만하다고 판단한 나는 창구의 여직원에서 그곳까지의 차표 한장을 요구했다. 여직원은 14,100원이라고 했다. 내 기억 속의 버스 요금은 정확한 액수는 흐릿하게 뭉개져 있었지만 10,000원이 안되는 액수로 남아 있었다. 버스 요금이 많이 올랐군. 아니면 정말 오랫만의 백담사행이거나. 나는 만원짜리 한 장과 4천원짜리 네 장, 그리고 청바지의 작은 동전 주머니에서 어렵게 꺼낸 백원짜리 한 개로 정확하게 셈을 치루었다(주머니가 작아 빡빡하게 들어찬 동전이 손에 잘 잡히질 않는다). 승차권은 4번 승강대에서 버스를 탄 뒤에 35번 좌석을 찾아가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왔고, 텔레비젼 앞에 빽빽하게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도 잠시 시선을 주었다. 틈틈히 승강대 쪽을 내다 보았고, 버스는 10분을 넘기지 않고 부지런히 승강대를 드나들고 있었다. 승강대로 들어온 버스는 창의 앞쪽에 떠날 시간을 내걸어 내가 탈 버스를 실수 없이 고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다. 10시 35분을 자신의 출발 시간이라고 알려준 버스는 나를 백담사에 내려준 뒤에는 고성과 대진으로 계속 달려갈 것임을 덧붙여 알려주고 있었다.
예전과는 가는 길이 달랐다. 그동안 버스는 나를 싣고 천호대교를 넘어간 뒤 미사리로 빠져나가고 그 다음엔 팔당대교를 넘어간다. 팔당댐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다리이다. 그리고 양평까지 뚫려있는 새로운 길, 새롭게 뚫린지도 한참이 되어 이제는 새롭다는 말이 좀 무색하지만, 그래도 옛길이 여전히 남아있어 앞으로도 계속 새길이 될, 바로 그 새 길을 따라 남한강의 풍경을 끼고 달린다. 하지만 이제 버스는 그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번도 타보지 않았으나 춘천까지의 시간을 1시간이나 줄여주었다는 춘천고속도로였다. 버스는 그 고속도로를 타고 내달렸다.
춘천고속도로는 내가 지금까지 타본 고속도로 가운데서 가장 재미없는 길이었다. 걸핏하면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터널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풍경은 터널 속으로 따라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서 황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멀거니 버스의 뒷꽁무미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버스는 그렇게 풍경을 뿌리치며 순식간에 춘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화천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바꿔탔다. 나는 빠른 속도로, 그러나 지루하거나 혹은 따분하기 이를데 없이 거듭되는 터널에 시달리며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갔다.
하지만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처음부터 터널을 지루해 하거나 따분해할 여지가 없었다.
원래 내 자리는 맨뒷자리의 바로 앞쪽 자리였다. 버스에 올라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젠장, 깊숙이도 들어가 박혀있네 하면서, 나의 자리, 바로 35번에 도착하자, 그 자리엔 이미 어떤 아줌마 한 분이 앉아계신다. 가는 동안 사진찍기 좋은 창가의 자리이다. 게다가 홀로 독립된 자리이다. 요즘엔 자리가 한줄에 넷이 아니라 셋밖에 안들어찬 버스가 있다. 때문에 둘로 붙이질 않고 홀로 독립된 자리가 한쪽으로 늘어서 있다. 그 자리 중의 하나가 내 자리였다. 아주머니한테 내 자리라고 했다. 아줌마, 그냥 자리를 바꾸어 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그냥 아줌마가 바깥 경치를 구경하며 가고 싶어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에이, 뭐, 인심쓰지 싶은 후한 마음으로 그러고마고 했다.
차는 동쪽으로 달리고, 햇볕은 남쪽에서 따갑게 창문을 파고 든다. 바로 하나짜리 독립된 자리들이 늘어선 곳의 창쪽이다. 빛이 따갑다. 몇몇 사람이 창에 커튼을 치고, 아줌마도 그에 합류한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든다. 기껏 양보해준 창가의 자리에서 아줌마는 풍경을 차창밖으로 팽개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예 커튼을 내려 입딱씻고 풍경을 외면한다. 나는 알게 되었다. 풍경을 팽개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팽개치고 외면한 바깥 풍경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이미 말한대로 풍경을 버스 바깥으로 팽개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나는 창쪽에 앉았더라면 바깥 풍경에 눈이 팔려 한번도 눈길을 주었을리 없는 버스 안쪽의 풍경을 두 시간이나 면밀히 살필 수 있었다.
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끼었다. 그러나 그것은 북쪽의 창에 한했다. 버스의 반을 북과 남으로 갈라 남쪽 창에는 성에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의 숨은 버스 안을 가득 메운채 절반은 북쪽 창으로 몰려갔다. 북쪽 창으로 몰려가 우리의 숨은 하얗게 창을 막아서고는 제 존재를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남쪽 창으로 늘어선 절반은 햇볕이 모두 거두어가 버렸다. 바깥은 분명 거기가 거기일 추위가 만연해 있을 테지만 안의 사정은 다르다. 바깥으로 쫓겨나면 다 같아지지만 안으로 들면 사정은 크게 다르다. 나는 버스 안 풍경에서 바깥의 세상은 고르게 평등하지만 안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대개 안에서 산다. 회사안이나, 또는 집안에서.
예전에도 버스는 화양강 휴게소에서 한 번을 쉬었다. 그 습관은 길이 바뀐 이번에도 여전했다. 휴게소의 뒤쪽 테라스로 나가면 냇물이 하나 흘러가고 그 물의 건너편으로 마을이 하나 보인다. 이상하게 꼭 그 마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게 된다.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마을 이름은 모르지만 마을 생김새는 안다. 자주 부딪쳐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아는 동네 사람들이 몇 있다. 이 동네는 그런 동네 사람과 같은 경우인 셈이다.
화장실에서 운전기사 분과 나란히 서서 볼일을 보았고, 아저씨는 내게 사진 찍으러 가냐고 물었으며, 나는 백담사로 사진찍으러 간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받고 주었다. 무엇인가 대화가 한쪽 방향으로 쏠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것만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나는 아저씨에게 여기서 백담사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고, 아저씨는 여기서 기껐해봤자 50분 정도라고 대답을 해주었으며, 덕택에 이번에는 주고 받았다. 이제 한쪽으로 쏠렸던 대화가 뭔가 균형을 맞춘 느낌이었다. 갑자기 뿌듯해졌다.
버스가 인제로 들어섰을 때 차창에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온겨울을 지분거렸던 눈이었지만 정말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그 전까지는 그 흔적마저도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인제에서도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백담사 입구에 도착하자 그곳은 하얀 눈의 세상이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같이 내린 아줌마 두 사람이 내 뒤를 따라오다 동네분에게 묻는다. 백담사가려면 어디로 가느냐고. 먼거리의 대화라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 아줌마 둘이서 백담사 방향을 물었을 거라는 점을. 왜냐하면 두 사람은 잠시 사진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춘 내 곁을 지나치며 백담사 방향을 다시 물었기 때문이다. 초행길에선 자꾸만 방향을 묻게 된다. 길이 하나라 묻지 않아도 되는 길이지만 아줌마들은 그 뒤에도 아직 멀었냐며 또 한번 말을 붙였다. 나는 좀 올라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아직도 백담사 입구까지는 좀더 걸어가야 한다. 길가에서 눈이 침대 두 개를 나란히 배고 누워있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하얗게 잠들었다 내일 아침 하얗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군. 보통 3월에는 밤을 기다리다 하얀 잠을 청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눈물을 흥건히 흘리며 침대를 비워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야. 오늘 밤 하얀 잠을 푹 주무시라.
무궁화이다. 우리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놀지만 오늘 무궁화는 하얀 눈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놀고 있다.
이제 동네를 벗어나 본격적인 백담사 길로 들어섰다. 발밑의 길이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간다. 왜 그래, 나랑 무슨 원수진 일 있어. 잠결에 가는 이빨도 아니도 훤한 대낮에 하얀 이빨을 대놓고 드러낸채 이빨을 갈다니.
보기와 달리 눈의 아래쪽은 얼어붙어 있는 얼음판이 많았다. 내딘 발이 힘없이 미끄러지면서 두세 번 엉덩방아를 찢어야 했다. 그때면 눈들이 와하고 웃는 듯했다. 눈밭이라 푹신하기는 했다. 그래, 그렇게 이빨을 갈더니 이제 속은 시원하냐. 나는 눈의 서늘한 체온을 즐기며 넘어질 때마다 잠깐씩 눈밭에 누워있곤 했다.
길을 가다 계곡을 내려다 보니 물가의 바위 하나 땀을 비질비질 흘리고 있다. 바위가 묻는다. 아직 한겨울인데 오늘 왜 이렇게 더운거지. 내가 답한다. 하얀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까 그렇지, 크크.
멀리 내가 가야할 길이 산의 허리를 갈라 먼저 가고 있다. 아마 지금가고 있는 길은 내가 저 길을 갈 때쯤이면 지금의 자리에서 숨을 몰라쉬며 자신은 여기서 쉴테니 나혼자 들어갔다 오라고 여기에 주저앉아 있을테지.
오늘, 용의검사 하는 날인가. 아주 손들 깨끗하게 씻고 왔네. 하얗게 빛이 나도록.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살얼음이 잡혀 있다. 살짝 얼은 얼음, 살얼음.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랄 때 살얼음 위를 얼음이 꺼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모하게 뛰어든 적이 있었다. 물론 다음 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난 이미 허리까지 물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때 왜 난 내가 살얼음보다 더 가볍고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살얼음을 보자 곁으로 내려가서 발로 톡톡 건드려 보고 싶었다. 무모함은 버렸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때의 생각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백담사에 도착했다. 어떻게 보면 설악산 오르는 길이 시작되는 길목이기도 하다. 처음 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곳을 지나 조금 걷다가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아직 설악산 대청봉이 멀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은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겨우 산이 시작하는 자리에 선 사람이 정상을 묻기 때문이다. 한시간 반의 시간을 걸어야 겨우 산의 초입에 설 수 있는 산이 내설악으로 오를 때의 설악산이며, 바로 산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맞아주는 것이 백담사의 일주문이다. 요즘은 버스가 이곳까지 다닌다.
백담사 바로 앞의 다리를 건너 백담사로 든다. 다리는 그 이름으로 보자면 건너면서 마음을 닦는 다리이다. 수심교(修心橋)라 불린다. 다리를 건너면서 마음을 닦지 않고 건너온 사람은 한 대 쥐어박을 듯한 그 분을 만난다. 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 마음이 닦이는 것인지 항상 쥐어박히지는 않았는데 오늘도 무사히 통과했다.
한참 동안 절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눈내린 날 왔을 때처럼 나한전의 앞뜰에서 누군가 눈을 치우고 있다. 그때는 분명 스님이었는데 오늘 눈쓰는 분은 스님같지는 않다. 뜰의 눈을 다 쓰는 것은 무리인지 열십자로 길을 내놓았다. 그 때도 그랬었다.
절을 돌아본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그리고는 백담사를 뒤로 했다.
**내일 계속됩니다.
5 thoughts on “백담사 다녀오는 길 – 들어가며 만난 풍경”
토요일 오전에 읽는 여행기, 좋습니다.
버스를 이용해 가는 여정을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마치 동행자라도 된듯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갑니다.
초행길에 자주 방향을 묻는 건 제 전공이죠.^^
다음편도 기다려지네요.
북한강변에서 칼국수 먹고 있습니다. 오늘도 알뜰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자두 있어요 음식 나오는 사이에 한 자 남겨요~ㅋㅋ
자두가 어디 있어요? 보여줘~ 보여줘~~
우린 낮에 국수리에서 칼국수 먹었는데.
이거 아이폰이신거죠?
무궁화 눈꽃 사진 많이 탐나옵니다.
ㅋㅋ 저두 있다구요.
아이폰 자랑질이죠. 뭐~ ^^
우리도 이제 들어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