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토요일날, 현승이 채윤이와 남한산성에 놀러갔다. 둘은 길건너 동네에 사는 나의 어린 친구들이다. 원래의 계획은 1)일단 베낭을 짊어지고 산에 가는 것이 역력하게 티나는 스타일로 동네에서 만난다. 2)버스를 타고 마천동쪽으로 가서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로 올라탄다. 3)산을 타고 연주봉옹성까지 낑낑대며 올라간다. 4)그곳에서 잠시 놀고, 먹고, 마시고 한다. 5)성곽의 아래쪽 길을 따라 북문으로 간다. 6)그곳에서 샛길로 잠시 새어나가 내가 아는 마르지 않는 약수터로 가 목을 축인다. 7)다시 북문으로 온 뒤 하남시쪽으로 하산하여 100번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 8)100번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버스가 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버스를 탄다. 8)하남 시장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버스를 바꿔탄다.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역시 뭐든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
그녀에게 오늘 몇 시에 만나기로 했냐고 했더니 10시 30분이란다. 그렇게 늦게 가서 어떻게 산을 타. 그녀는 그냥 차타고 가서 그래도 이게 산이다 싶을 정도를 골라 올라갔다 온 뒤에 오후 3시까지 돌아와야 한단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현승이와 채윤이네 아파트로 갔다. 두 친구가 바람같이 뛰어나온다. 원래 카메라가 흔들려서 사진이 뿌옇게 되는 법인데 어린 두 친구는 카메라는 가만히 있는데 지네들을 스스로를 흔들어 사진을 뿌옇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현승이와 악수로 반가움을 나누었고, 채윤이는 그녀와 포옹으로 반가움을 나누었다. 우리는 차에 타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는 남한산성이 한번도 정복되지 않은 성이라고 말했다. 현승이가 정복되지 않은게 뭐냐고 묻는다. 나는 함락되지 않는 거라고 했다. 아놔, 나, 왜 이러니. 점점 더 어려운 말의 미궁으로 빠져들다니. 결국 성을 적에게 한번도 뺐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복당하지 않으면 뭘해, 나중에 항복했단다. 한번도 정복당하지 않았지만 항복해버린 성, 우리는 남한산성을 향해가고 있었다.
현승이는 항상 궁금한 것이 있어도 나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는다. 엄마를 꼭 대변인으로 활용한다. 아무래도 크게 될 인물이지 않나 싶다. 큰 인물들은 말을 직접 섞지 않고 꼭 대변인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도 그 점은 여전했다. 언제 이 미래의 큰 인물과 직접 말을 섞게 될지 기다려볼 요량이다.
우리가 차를 세운 곳은 내가 서울 야경을 촬영하러 몇번 온 적이 있었던 국청사 입구의 공터였다. 국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밤에는 출입구를 잠가버려 차를 가져갈 수가 없다. 날이 좋지 않아 그런지 항상 공터를 메우고 있던 차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유있게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고 난 뒤 온몸으로 V자를 펼치고 있는 나무 옆에 채윤이를 세우고 작은 V자를 그리며 사진 한 장 찍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우리는 눈이 전혀 없는 길을 출발했지만 곧 눈길을 만났고, 그러면서 서문으로 갔다. 내 생각에는 거의 날로 먹는 길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탑 위에 작은 눈사람을 하나 만들어 올려놓았는데 내려오는 길에 보았더니 그 눈사람을 탑이 꿀꺽해 버렸다. 우리는 어, 눈사람 없어졌다고 아주 신기해 했다. 눈이 녹아 없어진 것도 신기한, 이상한 날이었다.
서문 바로 직전, 눈밭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햇볕의 사진 한 장 찍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햇볕은 눈밭에서 뒹굴거리면 무지 축축할 텐데…
계획은 자꾸만 틀어진다. 서문을 보자마자 채윤이가 문밖으로 한번 나가보면 안되겠냐고 했고, 그래서 그럼 나가보자고 문밖으로 나가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갔다. 그곳에 있는 망원경으로 서울 시내 구경을 했다. 나는 우리 동네와 현승이, 채윤이네 동네 사진도 찍었다. 아마도 동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우리 동네 홈플러스를 왼쪽에서 구별해낼 것이고, 현승이네가 사는 LG 아파트를 그 윤곽으로 오른쪽에서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네 사람 아니면 구별해내기 어렵다.
내가 너네 동네 아파트 찾아냈다고 하자 채윤이도 망원경으로 열심히 찾아본다. 그리고는 드디어는 찾아냈다. 현승이는 아직은 키가 모자라 망원경 앞에 서면 망원경이 하늘로 고개를 빳빳이 드는 통에 뜻을 지상의 낮은 곳으로 가져갈 수가 없었다. 역시 현승의 뜻은 아직은 하늘에 있다.
사실 전망대에서 가장 웃긴 양반은 현승모였다. 내가 현승이네 아파트를 보았다고 하자 옆에 망원경이 또 한 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현승모는 “정말 눈좋다”고 나왔다. 사실 나중에 그녀에게 건네들은 얘기였다.
난 사실 망원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망원경으로 뭘보면 눈알이 꼭 저멀리 그곳까지 튀어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여기 망원경은 공짜이다. 보통은 500원짜리 동전을 넣게 되어 있는데 여기 것은 전혀 그렇질 않다.
서문 전망대를 나와선 곧바로 컵라면 먹는 시간을 가지려 했으나 보통 때 자리했던 곳에선 빈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래도 남한산성에 왔는데 가장 높은 수어장대는 보고가야지 싶어 수어장대쪽으로 발을 옮겼다. 현승이는 눈만보면 가서 한번 밟아본다. 눈길에선 눈길을 주어야지 왜 자꾸 발길을 주고 그래. 눈이 오면 온통 눈길이라 눈길에 질리고 발길이 오히려 반가울까. 낸들 알 수가 있나, 그런 걸.
사실 올라오는 입구 쯤에서 아이젠을 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녀가 우리도 아이젠이 필요한 거 아니냐며 걱정을 했다. 난 괜히 한번 가져온 사람들이라고 아주 편하게 그 상황을 무마해 버렸다. 조금 올라가니 아예 아이젠을 차고 내려오는 사람도 눈에 띈다. 또 얘기가 나온다. 아이젠 찬 사람도 있는데? 이왕 갖고 온 거 억울해서 차고 내려오는 거야. 나는 또 그렇게 입막음을 했다. 눈은 거의 없을 것이라던 내 장담과 달리 수어장대로 가는 길은 온통 눈이 녹다 얼어붙다를 반복한 매끄러운 길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승이가 오히려 그 매끄러운 길을 좋아했다는 것. 우리는 슬슬 미끄러지면서 산을 올랐다.
올라가다 컵라면 먹을 막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즉각 그곳으로 올라 자리를 잡았다. 근데 그것이 찬바람 휘몰아치는 무지 추운 자리였다. 말하자면 남한산성의 극한대 지역이랄까. 어쩐지 사람들이 하나도 없더라니. 손이 시려 완전 후덜덜 떨면서 컵라면을 먹었다. 또 그 전에 젓가락을 가져오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여 바로 아래쪽에서 팔던 오뎅을 다섯 개 사다가 먹고 그 꼬챙이로 젓가락을 대신해야 했다.
그래도 상은 푸짐했다. 컵라면에, 커피에, 삶은 달걀, 그리고 사이다까지. 채윤이 식성에서 간택받지 못한 달걀 노른자 두 개가 졸지에 내 몫이 되는 행운이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선 일단 포효 한번 하는 것으로 힘을 냈다.
힘을 낸 우리는 이제 씩씩하고 힘차게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어찌 밋밋하게 그대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채윤이와 현승이는 눈덮인 길을 하얀 강이라고 하고 그 강을 건넜다. 강건너는 헤엄치지 않으면 건너갈 수가 없다. 그러나 강이 얼면 그 강을 걸어서 넘어가는 재미가 있다. 어렸을 적 시골살 때 그것이 겨울의 강가에서 누리는 즐거움이었다. 눈덮인 길을 하얀 강으로 삼아 옆으로 건너면 언강을 넘어 강건너로 가는 재미가 있다.
그냥 가기는 아무래도 섭섭하여 여기 남한산성에는 사실 성이 혓바닥을 낼름 내밀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곳을 연주봉옹성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지름길을 알고 있으니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갑자기 햇볕이 따뜻한 곳으로 나오자 아이들이 좋다고 동의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지름길은 작은 암문이었는데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막아놓고 있었다. 이런 난감할데가. 채윤이는 그냥 돌아가자고 했고, 현승이는 길을 돌아 그곳까지 가보자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최종 승리자가 결정하자고 했고, 가위바위보의 최종 승자는 채윤이었다. 거의 집으로 가는 분위기로 낙담 상태에 빠져있는데 채윤이는 어찌된 일인지 연주봉옹성을 외쳤다. 너, 예능이 뭔지를 아는 구나.
우리는 암문에서 내려오다 한라봉을 까먹었다. 까먹기 전에 한라봉 모델 놀이 잠깐 했다. 몇 발자국의 작은 언덕도 일단 올라 한라봉 하나 먹으면 그곳을 모두 한라산 오른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놀라운 한라봉! 우리는 그 한라봉을 까먹었다. 그냥 먹지는 않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하나씩 먹기로 했다. 마지막은 한라봉 하나를 통째로 걸고 했는데 누가 이겼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당사자가 밝히시오.
드디어 연주봉옹성. 내가 말한 남한산성의 혓바닥. 나는 적들이 힘들게 산을 올라오면 혓바닥을 낼름 내밀어 야이, 요것들아 힘들어 죽겠지 하며 놀려주려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낄낄거리고 웃었을 뿐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눈덮인 남한산성. 높이가 확보되니 역시 풍경을 즐기는 맛이 있다.
현승이, 연주봉옹성의 창으로 세상 한번 내려다보고 모세 할아버지 지팡이 잡으신채 터프한 웃음 한 방 날려주신다.
옹성 위에서 사진 하나 찍기로 했다. 각자 포즈로. 현승이는 날개를 폈고, 현승모는 말없이 조용하게 웃었으며, 채윤이는 약간 각도를 틀고 모델이 무엇인지 아는 포즈를 잡았고, 그녀는 전형적인 그 V자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옹성에서 두 가지 일을 했다. 먼저 우리가 올 때 지나쳐온 물웅덩이에 웅덩이라는 말대신 ‘개미의 바다’란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다. 그 선물은 현승이가 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 대전을 벌여 초콜렛과 과자의 승자를 가렸다. 둘 모두 승자는 현승이었다.
우리는 연주봉옹성을 끝으로 남한산성행을 마감했다. 나로선 그냥 한 곳을 맴돈 것 같은 기분인데, 또 한편으로 아주 먼거리를 돌아본 이중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려가는 길의 짧은 눈길에서 채윤이는 조심이었지만 현승이는 그 길에서 한번 넘어졌다. 그러나 현승이는 오늘 세번 째 넘어졌다고 아주 뿌듯해 했다. 그 얘기 듣는 순간 한번도 넘어지지 않은 나는 뭔가 아쉬움이 컸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향해 뛰어오더니 마지막으로 차가 서 있는 곳을 남겨두고 그곳까지 먼저가기 내기한다. 채윤이가 현승에게 한참 접어주고 출발했지만 결과는 역시 채윤이의 다리가 빨랐다.
마치 우리가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라 3시의 시간이 아파트에서 우리를 기다린 듯 우리는 딱 맞추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다.
봄이 오면 진달래가 피어있는 남한산성의 산길을 낑낑대며 걸어서 다시 오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채윤이를 위해 한번은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팔당에 갔다 올 생각이다. 얘들아, 그날 즐거웠어, 다음에 또 놀러가자.
13 thoughts on “현승이 채윤이와 함께 한 남한산성행”
마천동 쪽 남한산성 등산로 한 번 가고 싶군요.
현승이와 채윤이가 물 만난 제비들 같습니다.
애들의 눈높이레 맞춰 주시는 센스가 늘 놀랍습니다.
하남에서 잠실 오는 버스가 있더라구요. 그거 타고 오신 뒤에 마천동 가는 버스를 타도 되구요, 아니면 그냥 거피볶는 집 벨가또 부근에서 산을 타고 좀 길게 남한산성으로 가서 마천동으로 내려가는 것도 괜찮아요. 그건 좀 긴 코스이긴 한데 걸어볼만 하더라구요.
아이들하고는 그냥 가위바위보와 지팡이로 쓸 나무 막대기 하나만 집어주고도 얼마든지 놀 수 있어서 그게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아하! 이렇게 재밌게 놀았다는 얘기.
남한산성의 혓바닥은 항상 멀리서만 바라봤는데 거기도 가보고.
모세지팡이 든 현승이는 정말 콧수염 있는 모세같네요. 표정 무섭고요.
한번도 안넘어져 뭔가 아쉬운 동원님은 아쉬움 달래러 곧 또 가셔야겠네요.
4번은 넘어지셔야겠죠?^^
애들이 원체 재미난 애들이잖아요.
네 번 넘어지면 현승이 오기 발동할 거 같아요.
그나저나 현승이 개구장이삘 사진을 하나 찾고 있던 중이었어요.
위에 있는 사진 하나 가져다가 저희집 대문에 걸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ㅎ
사진이 몇 장 더 있는데, 그건 따로 드릴께요.
애들이 정말 털보 아저씨가 편하긴 편한가봐요.
사진마다 표정이 웬만하면 집 밖에서는 안보여주는 표정들이네요.
저렇게 편하게 웃고 까불고 하는 건 지네집 거실에서나 나오는데요.ㅎㅎㅎ
저는 챈이 가위보에서 이기는 순간 아찔했어요.
분명히 저거 기냥 집으로 가자고 할텐데 어쩌나… 하구요.
그 복불복 가위바위보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거 아니고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4:1로 갔으면 모두들 그렇게 즐겁지는 못했을텐데요. 가위바위보 승자가 챈이가 된 것도 다행이었구요.
우리편 중에 한 사람이 이겨서 가더라도 챈이는 끌려가는게 됐을테고,
불평했을테고, 엄마는 그게 보기 싫어서 구박했을테고….으~~~
하이튼, 짧지만 짧지않은 즐거운 산행이었어요.
진달래 필 때는 눈 좋으신 털보아저씨 원래 계획하셨던 그대루 꼭 가요.ㅎㅎㅎ
저도 그 순간 이제 오늘 산행은 이걸로 끝이구나 했는데 장난기 어린 웃음이 채윤이 눈가에 스치더라구요. 완전 뜻밖의 반전이었어요. 채윤이는 역시 괜찮은 아이!
진달래 필 때는 따뜻할 테니 훨씬 재미날 거예요. 올라가서 너무 힘들면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내려간 뒤에 30번 버스타고 집으로 오려구 했어요. 종점이라 거의 앉을 수 있거든요. 버스 타고 쿨쿨 자면서 오는 거죠, 뭐.
요건 내가 일빠~
한라봉의 마지막 승자는 나였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어린 친구들이 주무시는 바람에 고스란히 남았다오.
우리가 두물머리로 향하면서 먹은 한라봉이 그것이었소. ㅋ
으~, 가위 바위 보로 이긴 사람이 정하기로 했을 때
채윤이가 혓바닥성으로 더 가자고 할 때가 가장 멋졌다오.
또한 자유시간 나눠줄 때 털보님만 하나 더 챙겨주는 현승, 넘 귀엽지 않소.^^
그날 남한산성에는 온대와 한대가 동시에 있더라.
컵라면 먹었던 장소는 정말 너무 춥기는 했어. 시골 같았으면 당장 불피웠을 텐데… 언제 멀리 놀러가자.
그나저나 오늘 다시 보니
저 계획대로 했다면 애들 완전 뻗었을텐데…ㅋㅋㅋ
어딜 맨날 멀리 놀러가자고 하슈?
애들은 한강 수영장만 가도 아주 좋아라 할거유~
강릉으로 가자.
공짜 숙소가 있으니까.
바다도 보구.
강릉이요?
공짜 숙소요?
바다요?
우히히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