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ory62: 공사하기 전에 집주변의 주인들에게 식용유 한박스를 돌린다.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민원을 가급적 접수하지 말아달라는 표시이다. 그럼 전세나 월세에 사는 사람들은? 집없어서 서러운데 공사 소음도 감내해야 하는걸까?
eastman21: 전세사는 사람들 한테도 돌린다. 이전의 전세사는 사람들이 가져갔다. 요즘 다 돌린다. 빠짐없이.
forestory62: 공사하고 있는 집주변에 사는 사람 중에 어린 아기도 있을 수 있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녁에 잠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아픈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집지을 수 있다는 것으로 공사의 소음을 방관해도 되는 것일까.
eastman21: 예전에는 공사할 때 가림막도 없이 일했다. 지금은 가림막도 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에도 신경쓴다. 기준을 높게 잡는 것은 좋지만 너무 높게 잡으면 현실성이 없는 뜬그름이 된다. 발전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forestory62: 집주인도 세사는 사람도 모두 공평하려면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공사를 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공사장 인부들의 노동시간도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너무 길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노동시간이 정당한 근로시간에도 맞기 때문이다.
eastman21: 합리적 사고란 그런 것이 아닐까. 공사를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는 것이 너무 긴 노동시간이니 이것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 나라는 공사를 이렇게 길게 할 수밖에 없고 다른 나라는 가능한 것일까를 묻는 것이 아닐까.
forestory62: 가림막이나 안전에 신경쓰기 시작한 것도 많은 사람들의 민원제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주어지는 건 없다. 여러 번의 싸움과 민원제기 때문에 이상이 현실성있는 대책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eastman21: 맞는 얘기다. 그러나 노동시간이 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있는 상황에서 민원 제기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고역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단속한다고 다 없어지진 않는다.
eastman21: 겉을 보고 비교하기는 쉬워도 어떤 겉의 기반이 무엇일까를 찾아보고 비교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쉬운 시각만 탐닉한다.
eastman21: 항상 드는 예인데 “팔을 든다”와 “팔이 올라간다”는 겉으로는 똑같은 현상이지만 내재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사회적 현상도 겉으로는 똑같지만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현상을 말할 때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eastman21: 젊은 사람들에게 사회참여적 시각을 갖추라고 흔히 말하는데 그건 괜한 소리는 아니다. 참여적 시각이 대개는 어떤 현상의 내재적 속성이나 구조적 속성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때 겉을 맴돌던 시선이 비로소 내부로 들어간다.
forestory62: 겉을 보고 비교해보지 않고 어떻게 기반을 따지고 들어갈 수 있을까. 일단 겉모양이 다르니 그 비교를 해보고 그리고 그 기반을 따져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면 쉬운 시각의 탐닉이지만 그 시작은 왜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eastman21: 겉만 비교하니까 문제이지 않은가. 겉이 의문의 시작일 때는 비교의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 탐구의 시작이 되지. 비교는 의문 없이 이미 결론의 자리에 서는 성급한 모습 아닌가.
forestory62: 그것이 고민이다. 그것이 싸우는 사람들의 갈등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확히 보면 집을 가진 자와의 민원이지 집을 짓는 노동자와의 민원제기가 아니다.
eastman21: 믿기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고민 없이 쏟아낸 얘기로 보였다. 6시부터 6시까지 하는 노동은 너무 길다라는 것은 그냥 누구나 눈으로 보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기니까 줄여야 한다는 얘기는 생각없는 얘기가 될 수 있다.
forestory62: 무엇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름 다들 생각이 있을 것이다. 깊이는 다를지언정.
eastman21: 고민이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 앞의 말들이 고민없이 쏟아낸 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민은 오히려 말을 막는 경향이 있다. 고민은 말들을 쏟아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재보게 만든다.
eastman21: 생각이 있다면 왜 이렇게 길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forestory62: 그저 소소한 대화를 아무런 가치판단없이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다. 글도 아닌 그저 소소한 대화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불신의 벽이 깊다.
eastman21: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마구 올라오는 얘기를 가벼운 얘기라고 쏟아내고는 그것에 반하는 얘기를 꺼내들면 소통이 안된다고 말한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야 소통이 되는 더러운 세상.
forestory62: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마구 올라오는 얘기는 서로 피차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얘기하기에 바뻐서 남의 얘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기는 한 것일까.
eastman21: 상대의 얘기를 듣고 그 다음에 한 얘기는 상대의 얘기를 이미 들은 얘기가 아닌가. 처음 얘기를 꺼낸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계속 하는 것이 상대의 얘기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닌가.
forestory62: 계속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 자리를 떠나는게 가장 바람직하다.
***트위터는 글이라기 보다 말에 가깝다. 그러나 일반적인 말과 달리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기록된다. 들여다보며 어디서 소통이 막혔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면 트위터는 매우 유용한 말이 될 것이다. 트위터의 가장 큰 효용으로 보인다.
2 thoughts on “어떤 소통 부재의 대화”
밤에 누가 공사했어유?..공사를 왜 밤에 해서 공부하게 만드냐고요.
시간날때마다 두고두고 읽어봐야 감이 잡힐듯..ㅋㅋ두분다 대단하심.
말을 주고 받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뒤를 돌아보지 못하니까요. 트위터는 복기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아주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생각하는 것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