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 서로를 눈에 넣어도 안아프던 시절,
둘 사이의 마음 속엔 사랑이라 이르는 느낌이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면
그 사랑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관성의 법칙에 밀려가는 생활만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이 밀어낸 그 사랑의 상실을 슬퍼한다.
그러나 그게 슬퍼할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오늘 사랑이 비어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까.
그 생각의 끝에서 오늘의 사랑 연서를 엮었다.
처음 우리가 서로를 만났을 때,
그때가 기억 나시는 지요.
당신은 그저 빗방울에 담긴 내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빼았겼죠.
오직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우리는 함께 살기로 했어요.
그때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 사이에 생활이 들어차고
그러면서 사랑은 흔적만 남더니
그 흔적마저 점점 메말라갔죠.
나중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이젠 그 흔적의 자리만 남아있을 뿐이예요.
우리는 한동안 그 흔적의 터만 붙들고 살았어요.
사랑이 사라진 텅빈 자리는
그냥 안내문만 서 있는 텅빈 유적지처럼 쓸쓸해요.
우리는 그 흔적의 자리라도 잡아두려고 안간힘이었죠.
몸을 돌돌 말아 쥐고
그 자리만이라도 지키려 했어요.
그러나 그 안간힘도 소용이 없었죠.
결국 우리들에게 남는 것은
사랑도 사라지고,
그 흔적도 사라지고,
그 흔적의 자리도 사라지고,
사랑의 모든 것이 사라진 텅빈 느낌 뿐이예요.
사랑하는 당신,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느낌에 집착하지 말아요.
그 느낌은 그냥 보내버려요.
나는 요즘 시집을 한 권 읽고 있어요.
이영주의 <108번째 사내>예요.
시인이 그러더군요.
거미의 집은 무덤이라구.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예요.
그건 날벌레들이 갇히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무덤이예요.
사랑을 지키려는 우리의 발버둥이 혹시
사랑의 무덤을 파는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우리 그 무덤을 거두기로 해요.
생각해보니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는
오히려 기뻐해야할 일인 것 같아요.
이제 그 자리에 또 사랑을 채울 수 있을 테니까요.
가득찬 사랑은 오히려 경계해야할 것이예요.
자꾸 그것을 지키려 만들 것이 뻔하니까요.
지키는 사랑은 힘들 것 같고,
빈자리를 채워가는 사랑이 더 기쁘고 신날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그 빈자리에 채워질
다른 모습의 사랑을 생각하기로 해요.
이번의 우리들 사랑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는
완전 멀티 복합 8채널 사랑이 될지도 몰라요.
또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목젓을 간지르는
풋내음을 풍길지도 모를 일이구요.
나이 들어 이게 왠 주책이야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나이를 잊게 만드는 거니까요.
그래도 역시
사랑이라고 하면 뜨거움이 최고죠.
하지만 이제는 뜨거움 속에 빗방울의 영롱함을 품을 수 있을 지 몰라요.
그러니 타오르는 빗방울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은 그런 건가봐요.
첫느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리를 비우고
또 채우고,
그리고 비우고를 반복하는 것인가봐요.
2 thoughts on “빗방울로 엮은 사랑 연서 아홉번째”
그렇게 물으시니 갑자기 대답이 막막합니다.
때로 글은 현실로부터 얻어지는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을 그렇게 끌고갔으면 하는 희망이기도 하죠.
언제가 세계적 육아법을 쓴 저자의 어머니와 인터뷰을 한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는데,
그 어머니 말씀인즉,
“그 애가 그 책처럼 키워진 것은 아니죠” 였다고 합니다.
그때 한참 웃었습니다.
얼마나 살면 이렇게 할 수 있는거죠 ? 집착하지 않고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할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