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는 MP3 플레이어를 사고야 말았다.
내가 주로 쓰는 MP3 플레이어의 기능은 사실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녹음 기능이었다. 가끔 인터뷰를 해야 하는 나로선 좋은 녹음기 하나가 필수적이지만 언젠가 연극 연출가 오태석을 인터뷰하기 위해 샀던 녹음기가 그 일을 끝내고 한달이 채가지 못하고 망가지고 난 뒤에는 이른바 테이프를 돌려서 소리를 수록해준다는 기존의 제품에 관해선 극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몇번의 인터뷰에서 나중에 녹음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낭패를 겪은 다음에는 더더욱 테이프 녹음기에 대해선 눈길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다 몇년전 딸아이를 위해 아이리버를 하나 사주었고, 비록 내가 사주었지만, 딸아이의 그 MP3 플레이어에 기생하며 그럭저럭 아쉬움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이 잦아지면서 이제 음악을 듣는 기능으로서의 MP3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행은 사람에 대해 두 얼굴을 가지게 만든다. 사람 만나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지만, 아울러 사람과 부딪치는 것이 여행의 고역이기도 하다.
한번은 뒷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아침 7시에 출발한 버스 속에서 10시에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떠들어서 그 대단한 입심의 소음에 시달린 나는 도중에 그냥 내 귀를 떼어서 어디로 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는 아줌마들이 떠들 기회가 없어서 이럴 때 실컷 떠드는 거라며, 아줌마들 편을 들었지만, 성큼 고개를 끄덕이게 되질 않았다. 사실 그날 그녀도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동네의 아파트가 얼마 올랐다는 얘기류가 주축을 이루는 그 아줌마들의 얘기는 그녀 역시 그냥 듣고 있기에 고역인 것임에 분명했다.
바로 옆자리의 사람은 대체로 처음 부딪치는 서먹함으로 인하여 보통 잠자코 눈을 내리 감고 행선지로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재수 없으면 바로 옆자리의 사람도 강력한 소음의 원천을 이룬다. 한번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책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가는 통에 완전히 돌아버리는 줄 알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의도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자신이 이런 책을 읽고 있으니 좀 봐주고 말을 붙여달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차창 쪽으로 90도로 돌린 뒤, 그 투명한 벽을 뚫고 나가기라도 할량으로 깊이 쑤셔박고는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하며 갔다.
여행길마다 딸아이의 MP3 플레이어를 빌려가면 되지만 요즘은 그게 여의치 않아졌다. 딸아이가 듣는 음악이 우리가 듣는 음악과 점점 괴리감을 형성하면서 내 것을 따로 담아야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려면 용량도 부족해지고, 또 그 수고가 내가 보기엔 적지 않게 귀찮은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아내가 친정으로 어머니를 보러간 날, 집에서 인터넷으로 거원에서 나온 iAudio 5를 슬쩍 구입해 버렸다.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오면 기분이 좋을 테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가 쉬울 것이란 계략에 의한 판단이었다. 돌아온 아내에게, 갑자기 물건이 싸게 나와서 하나 샀다고 하자,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금방 그 짧은 순간의 긴장을 흐지부지 끝내면서, 그냥 잘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20만원을 10개월 할부로 끊은 iAudio 5가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 포장지를 끌렀을 때 눈에 들어온 이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뭐, 이렇게 촌스런 제품이 다 있나 하는 것이었다. 제품 자체도 그랬으며, 특히 목걸이 줄은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딸아이가 내려와 한번 힐끗 생긴 걸 살피더니 손톱만큼의 관심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생긴 모양을 빼면 마음에 드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길, 삼순이 인기가 상종가를 치는 마당에 무슨 디자인에 그렇게 신경을 쓴담. 다른 무엇보다 확연하게 좋은 점은 음질이었다. 아이리버보다 3배는 좋았다. 녹음의 질은 다섯 배는 좋은 것 같았다. 녹음 시간도 절반을 음악으로 채울 경우, 나머지 500MB의 공간으로 8시간 정도를 최상의 음질로 녹음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곧바로 MP3 파일로 생성이 되기 때문에 그냥 복사해서 쓰면 그만이었다. 흔한 USB 라인으로 곧장 연결된다는 점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울러 내가 사용하는 매킨토시에서 별다른 프로그램없이 그냥 하드로 인식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흡족스런 면의 하나였다. 건전지가 작은 AAA 사이즈란 것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하지만 펌웨이의 업그레이드는 윈도 PC를 빌려야 했다. 매킨토시에선 속수무책.
iAudio 5에 음악을 담고 여행을 떠났다. 옆자리의 녀석이 핸드폰을 꺼낸다. 한통화하는 동안은 참았다. 두 통화째 들어간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방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았다. 음악이 녀석을 옆자리에서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그것만이 아니다. 음악과 함께하는 순간, 버스의 덜덜거림은 순식간에 음악의 선율에 실린 율동으로 돌변한다. 버스가 흥겹게 몸을 흔들며 길을 간다. 나는 종종 버스가 어떻게 음악적 선율에 이렇듯 보조를 맞추며 미끄러지고 있는지가 다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내내 음악과 함께 하였다. 내가 함께 했으며, 이제 여행 때마다 동행하게 될 음악들은 다음과 같다.
-Bad Company의 Shooting Star: 나는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며, 배스킨 라빈스에 가도 Shooting Star만 사먹는다. 나는 그 아이스크림도 톡톡 튀는 맛이 그들의 음악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이 노래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오리지널 버전이며, 그들은 근래에 이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변주했다. 나는 그 두 곡을 모두 좋아한다.
-로커스트의 하늘색꿈: 그들의 이름, 로커스트가 메뚜기란 것을 알았을 때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Eagles의 Hotel California: 대학 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제패니아(Zephaniah)라는 록밴드가 있었다. 예언자라는 멋진 이름이었지만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제패니아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들은 항상 개패니아였다. 그들이 언제나 개패듯이 연주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언젠가 볼 일이 있어서 총장실에 들렀을 때의 일도 생각난다. 총장님은 얘기 끝에 그런데 자네들 말이야, 그 음악좀 작게 틀어놓고 들을 수 없나, 하고 애원조로 부탁하셨다. 우리의 아지트는 총장실이 마주보이는 맞은 편 건물에 있었는데, 주변에 강의실이 없었던 관계로 우리는 음악과 함께 그 소리를 따라 증발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볼륨을 잔뜩 높이고는 떠나갈 듯 음악과 함께 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총장님과 함께 나누려고 일부러 크게 트는 거예요. 그때 그 총장님은 그래도 멋진 분이어서, 그 얘기를 듣자 허허 이 사람들, 하고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학교의 축제 때 그 학교의 교내 밴드가 공연을 한다길레 우르르 아는 애들끼리 몰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이 이 곡을 연주했었다. 보컬의 마이크가 고장나서 그들은 노래 없이 끝까지 곡만 연주해야 했다. 그 긴 곡이 모두 마무리되었을 때, 드디어 마이크가 정상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보컬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세계 최장의 기타 튜닝을 들으셨습니다.”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그들은 그 곡을 다시 시작했다.
-Corrs의 Radio: 이 곡을 듣고 있으면, M-TV에 나와서 Unpluged 공연을 할 때의 그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특히 음흉스럽게도 나의 경우엔 카메라가 수평으로 훑고 지나갈 때 내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안드레아의 가슴이 그때와 다름없이 눈앞을 지나간다.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왜, 우리는 그때 그 시절에 디스코장에서 대미를 장식할 때면 항상 이 곡으로 마무리를 했었던지. 어느 날 아내는 내가 집안에서 이 곡을 틀고 있자 딸애한테 저게 무슨 곡인지 아냐고 했고, 딸아이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저게 바로 노래방에 가면 아빠가 즐겨부르는 노래가 아니냐고 했다. 그랬더니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노래가 저 노래였어요?” 내가 부르면 어떤 노래도 그 노래가 그 노래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노래를 감쪽같이 숨겨서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은폐의 재능은 대한민국에 나밖에 없다.
-Deep Purple의 April: 나는 처음에 이 곡에 오케스트라가 동원될 줄 알았으나 나중에 단 네 사람의 딥퍼플 멤버가 이 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네 명의 그 위대한 힘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딥퍼플을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리치 블랙모어 때문이다. 그는 떠났지만 적어도 이 곡에서만큼은 콩볶는 듯한 드럼 비트와 함께 시작되는 “April is a cruel time”의 노랫말을 이끌고 있다.
-황신혜 밴드의 짬뽕: 나는 특히 이 노래의 중간 부분에서 제 흥에 겨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에~헤이라고 내지르는 괴성을 사랑한다. 아울러 쫄깃한 면발처럼 얽히길 바라며 짬뽕을 먹자라는 발상도 매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펑크락이라면 그것도 음악이냐며 거의 증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펑크락을 즐기는 편이다. 그 음악의 일탈을 사랑한다.
-Deep Purple의 Smoke on the water: 나는 노래에 늙고 젊음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가 주로 들었던 Smoke on the water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 마지막을 장식했던 엔딩 곡이었다. 그것은 Deep Purple이 나이든 뒤의 공연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나는 초창기의 앨범 중에서 그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나는 같은 노래에서 뿜어나오는 전혀 다른 젊음의 폭발력을 감지하고 몸을 떨어야 했다. 젊음이나 원숙미가 노래가 배어들면, 노래의 느낌이 완연히 달라진다. 이 곡은 무려 여덟 곡에 걸쳐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나는 이 여덟 곡이 같은 곡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모두가 내게는 각각 다른 곡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93년 버밍햄에서 있었던 라이브 공연의 실황 앨범에 들어있는 곡이다.
-큐빅의 오! 춘향: 우리는 세대를 달리해도 모두 같이 살 수 있다. 그것도 재미나게. 음악의 가장 현대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랩과 옹해야가 결합하여 열어보이는 그 가능성이 이 음악의 매력이다.
-Rainbow의 Temple of the King: 이걸 좋아하는 이유는 기타와 노래가 리치 블랙모어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동안은 여행길에 항상 음악이 함께 할 듯하다. 광화문에 나가는 길이 있으면 체리 필터의 CD를 하나 사올 생각이다.
4 thoughts on “MP3 플레이어를 새로 사다”
글 잙 읽었습니다.
mp3 얘기보다 지난 날들을 사뭇 그리워지게 하는 음악 얘기가 더 솔깃하네요.
벌써 18~9년 전 얘기가 되겠는데,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라는 소설을 읽고, 레인보우의 왕의 신전을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 속에서 이 노래가 기가 막혔어거든요…..,여우의 해 어느날 누군가가 왕의 신전을….., 언제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노래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차가지고 음악을 실은 뒤 드라이브까지 나갔다 왔습니다.
아이리버와는 이제 안녕인 것 같습니다.
iAudio에 빠지면 다른 mp3p는 거들떠보지 않는 현상이 생기죠.
저도 iAudio 256MB짜리 잠시 쓰다가 사정상 팔고 iriver mp3cdp를 샀는데 어찌나 그립던지. 판 지 1년이 지났지만 iAudio만큼의 음질을 구현하는 mp3p는 없더군요.
잘 쓰시길.^^
긴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전 U10나오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