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원래 가려고 한 곳은 대관령이 아니었다.
원래는 진부에서 내려 점봉산 쪽으로 내려간 뒤
이끼계곡을 찾아 멋진 사진을 찍고 하룻밤을 그곳의 민박집에서 묵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음악으로 귀를 꼭꼭 막아버린 탓에
진부에서 내리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진부 다음의 횡계에서 내려야 했다.
버스는 3시 25분 차였다.
어딘가로 떠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하루 자고 오면 그만이다.
사진찍으러 가는 길에 자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냥 이번에는 되는대로 일단 떠나고 싶었다.
버스가 천호대교를 지날 때
광진교가 마주보였고,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며칠 동안 어디론가 그냥 달리고 또 달리고 싶기도 하다.
이 산은 쇠나무를 너무 많이 심었군.
보기 흉해.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버스를 타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항상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가다 보니
오른쪽으로 시선을 많이 주는데
이번에는 내내 왼쪽만 보며 갔다.
왼쪽만 보니 멀리 어디선가 거대한 부처님 상도 보였다.
진부는 한번 간 적이 있었다.
난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버스는 그냥 계속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터미널을 옮겼나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진부를 빠져나가 버린다.
운전수는 그냥 방송으로만 진부 내리실 분 나오세요라고 했다고 했다.
음악으로 귀를 막은 나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질 못했다.
결국 나는 횡계에서 내렸다.
횡계에서 내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대관령 옛길>이란 표지판이었다.
그 표지판을 보는 순간 그때부터 그 길이 나의 행선지가 되어 버렸다.
터덜터덜 걷다보니 양떼목장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양떼는 없고 소 몇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이제 하늘은 저녁빛이 완연했다.
시간은 6시 50분이었다.
소는 항상 한가롭다.
밭을 멜때도 소의 걸음은 한가롭다.
그래도 밭을 메지 못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표정도 역시 한가롭다.
소가 날보고 그러는 것 같다.
-이 저녁에 대관령을 넘는다고? 무슨 일이길레. 어쨌거나 밤이라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
그러고마고 했지만 내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저녁인가 싶었는데
금방 어둠이 밀려들었다.
멀리 나무 한그루가 어둠을 뒤집어 쓴채
푸른 하늘빛을 호흡하고 있었다.
대관령 휴게소 쉼터란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1500원짜리 컵라면.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내 몰골이 불쌍해 보였는지
아내에게 밥좀 내오라고 했다.
덕분에 고프던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아저씨가 뒤쪽으로 갔다가 오시더니
반딧불이 본 적이 있냐고 했다.
먹던 컵라면을 들고 뒤로 가서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구경했다.
아저씨도 10년만에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어둠 속에서 많이 보게 되었다.
짝짓기할 때 불빛을 낸다고 했다.
사랑하면 빛이 나는 셈이다.
쉼터의 아저씨가 지름길을 일러 주었지만
캄캄한 어둠 속의 초행길인지라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내가 가는 길의 표지엔 선자령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길목에 있는 대관령 기상대의 문을 두드려
이리로 가면 대관령 옛길로 가는게 맞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들었는데 직접 가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강릉쪽으로 가야하는데
자꾸만 <평창의 자랑 선자령>이라는 문구가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중간에서 등산지도를 만나게 되었다.
아저씨가 가르쳐준대로 갔더라면 1시간은 줄일 수 있는 거리를
빙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중간에 등산지도를 본게 다행이었다.
그곳에서 반정으로 내려가는 샛길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칠흑의 숲 속길을 걸어 한참을 내려오자 대관령 옛길이란 표지가 있었다.
쉼터를 떠나서 1시간만에 도착한 것이었지만
어둠 속이라 그런지 한 3시간은 걸은 느낌이었다.
내가 가는 옛길에는 인적하나 없는데
멀리 새로 난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길에는 불빛이 환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내 안의 분을 삭이지 못해 떠난 여행이었다.
가끔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 한마디가 내 안의 분이 된다.
상대방이 미안하다는 사과로 말의 잘못을 거두어 들이려 애써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냥 내가 들었던 그 말만 머리 속을 뱅뱅 돌며 분을 증식시킨다.
그 때문에 나는 그 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오후라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되는대로 서울을 떠났고,
어쩌다 한밤의 대관령 옛길을 가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 때는 어두운 숲길을 가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분노 때문에 귀신이라도 눈앞에 나타나면 놀라기는 커녕 흠씬 두들겨 패줄 심사가 된다.
나는 그렇게 어둠 속의 길을 가고 있었다.
어두운 산길을 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캄캄한 어둠 뿐.
갑자기 어둠이 내게 말한다.
-분노란 어둠과 비슷한 거야. 그 속에 갇히면 아무 것도 보이질 않지. 그러니 네 분노는 오늘 밤 이 어둠 속에 내려놓고 가. 어둠에 붙들려 있으면 넌 길을 갈 수가 없어.
난 어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사방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고,
또 손전등의 전지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친구 삼아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주막을 가리키는 반가운 표지가 있었지만
주막터였을 뿐 실제로 주막은 없었다.
가끔씩 바람이 나무를 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나무를 흔들면
그 소리는 마치 계곡의 물소리 같았다.
그 때문에 나는 바람이 나무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물속으로 잠긴 듯,
그래서 숨이 막힌 듯 잠깐씩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그 어둔 밤에 드디어 대관령 옛길을 따라 고개를 넘었다.
길의 입구에 있는 대관령 박물관이 나를 반겨주었다.
시간은 11시였다.
횡계에서부터 걸었으니 4시간 정도 걸은 셈이었다.
숙소를 찾아 내려가다
누군가 낮에 옥수수와 감자를 팔기 위해 마련해놓은 간이 판매대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며 2시간 동안을 뒹굴거렸다.
곁에선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다 보니 겉을 맴돌던 쌀쌀한 바람기가 살갗의 밑을 파고 들었다.
조금을 걸어 모텔을 하나 찾아냈다.
모텔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제의 밤길을 거꾸로 가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산길의 입구에서 어제 물소리로만 듣던 계곡을 잠시 눈에 담았다.
산길을 오르는 초입에서 만난 달개비.
하지만 결국 횡계로 가는 걸음은 중간에서 접어야 했다.
왼쪽 발로 자꾸 모래 알갱이를 밟는 느낌이 들어
신발을 벗어보았더니
발바닥과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결국 다시 길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나간 뒤
동서울로 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물집 생긴 발바닥.
10시간을 걷고도 물집이 생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5시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발에 물집이 생겼다.
치밀었던 울화의 흔적같았다.
(사실은 등산 양말을 안신어서 그런 거 같다.)
걸을 때마다 쓰리고 아프다.
(아, 그리고 발씻고 찍었어요.)
6 thoughts on “어둠 속에서 대관령 옛길을 가다”
동원님은 그런 방법으로 분을 삯히시는군요.
지금은 평온해지셨다니 다행인데 그럴때마다 통통이님께서 걱정 많이 하시겠어요.
전 가끔 일상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때 도서관으로 달려가요.
집에서 가깝고 낮에가면 일반 열람실엔 사람이 꽤 있어도
어린이 자료실엔 직원외엔 없거든요.
읽고싶은책 한권 빌려서 어린이 자료실에 들어가 편히 다리 뻗고 읽기시작해요.ㅋㅋ
저만의 드넓고 편안한 서재가되는거죠.ㅋㅋ
산이나 바다에 가면 꼭 어떤 답을 듣게 되더라구요.
어둠 속에 두고 온 분노가 지금 쯤은 땅속으로 꺼져들어갔겠죠?
무슨 일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화가 나셨었나봐요.
물집이 잡혔지만, 깨끗이 씻은 발 사진이 조금은 편안해지신 것같은 느낌을 주네요.
그리고 저 주막이라는 표지판, 주막은 없었다지만 정겨워요.
또 평상에 누워 뒹군 그 2시간은 정말 샘나는걸요.
산속에 누워 별본적이 딱 한번 있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지금은 마음이 평온해 졌어요.
다 내려온 뒤 올려다보니 그 시커먼 산을 어떻게 내려왔나 싶더라구요.
손전등이 없으면 어림도 없는데 그게 있다보니…
그러고 보면 이렇게 밤에 산에 가는 것도 알고 보면 다 문명의 폐해예요.
작년에 손전등없이 설악산 가서 고생한 이후로 그걸 두 개씩 넣어갖고 다니고 있죠.
평상도 좋았지만 사실 중간에 숲속에서 물가의 넓은 바위에 앉아 보낸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좋았어요.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는…
Forget who you are.
Forget where you are.
You are on a beach in Silent.
Your eyes closed.
해변 대신 계곡이긴 했지만 마치 눈을 감고 있는 듯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보인 건 마찬가지였죠.
요즘 소들은 밭을 메는 소가 아마 없을걸요..~
농기계로 편리하게 다해버리쟎아요. 오우~! 사랑하면 빛이난다.
이부분에 무척 감동이에여!
칠흑의 숲 속길을 걸으셨꼬..발에 물집…..너무 아프겠군요.~~
아~~작은 달개비 꽃이 수줍어 하고..계곡의 풍광이 빼어나네요..~
밭을 메는 소는 어릴 적 기억이죠.
시골에서 자라서…
조금 더 올라갔더라면 더 좋은 풍광을 선물할 수 있었는데 물집 때문에.
밤에 내려올 때 물가의 넓은 바위에 앉아 한참 쉬었는데 그냥 풍덩 뛰어들어 목욕하고 갈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깜깜해서 보는 사람도 없고.
달이나 떴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어제는 그믐 때 였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