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여행 둘째 날의 첫번째 일정은 진도로 가는 것이었다. 진도는 처음이다. 그 옆의 완도는 한번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완도가 행선지는 아니었고 제주가는 길에 거쳐간 것이었다.
차는 아홉 시쯤 어제 빠져나왔던 대천IC로 다시 들어섰다. 시내에서 아주 가까워 고속도로 타기는 아주 편하다. 막히지 않을 때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이니 이쯤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서 어디 해변에서 숙박을 하고 밤시간의 대천 해변을 즐기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대천은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잠깐의 정체가 있었다. 30분 정도 밀린 것 같다. 그렇지만 차들이 서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곧 길의 앞이 훤하게 트였다. 차는 빠른 속도로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여전히 길 바깥은 눈세상이다. 논밭과 산이 모두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채 올겨울이 얼마나 춥고 눈이 많이 내렸는지를 거의 가는 내내 알려주고 있었다. 눈내리고 어지간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간히 철새떼들이 집단 비행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인가 엄청난 까마귀떼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어릴 때는 참 어지간히도 까마귀를 싫어했다.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는 낭설 때문이었다. 오래 살면서 생긴 미덕 중의 하나는 근거도 없이 쌓아두었던 어린 날의 그릇된 믿음들을 많이 버렸다는 점이다. 까마귀도 어릴 때의 내 편향된 믿음에서 벗어난지 오래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결국 휴게소에 들어가 두꺼운 겉옷을 벗고야 말았다. 2월이 시작되면서 날이 풀린다는 얘기는 있었지만 남쪽은 그 기운이 더욱 완연했다.
목포로 내려가면서 참 여러 곳에서 쉬었다. 1시간을 달린 끝에 군산휴게소에서 쉬었고, 그 다음엔 다시 두 시간을 달리고 나서 고인돌휴게소에 들렀으며, 다시 30여분 뒤 옷을 벗기 위하여 함평천지휴게소로 들어갔다. 함평천지휴게소에선 그녀가 재수좋게 마침 공짜로 나누어주고 있던 청보리 한봉지를 얻었다. 설이라고 귀성객을 대상으로 펼치고 있는 행사였다.
도로옆으로 보이는 산소들을 보니 눈을 절반만 걸치고 있다. 햇살 잘드는 곳은 녹고, 그늘진 곳은 눈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리라. 봉분의 크기가 한뼘도 안되어 보이는데 눈의 운명을 반반으로 갈라놓고 있다. 어쨌거나 내 눈에는 유치원 모자를 삐딱하게 반만 걸치고 있는 듯 보였다. 다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된다는데 죽고난 뒤에는 눈오고 나서 반쯤 녹았을 때 또 어린 아이가 되나보다.
드디어 목포이다. 목포의 유달산엔 한번 오른 적이 있다. 그때는 사진을 찍어두었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녀와도 한번 간 적이 있는 듯한데 그건 기억이 흐릿하다.
시간은 이제 오후로 접어들어 1시를 지나고 있었다. 9시쯤 대천에서 떠났으니 네 시간 걸려 도착한 셈이다. 여기서 다시 진도로 가야 한다. 아이폰을 켜고 네비게이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의 빠르고 곧은 길을 달려온 차는 목포에서부터 구불구불거리는 국도를 따라 진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서울에서 진도가는 고속버스가 뒤따라오고 있다. 거의 내내 이 버스와 함께 진도까지 갔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곧장가는 고속버스도 있구나.
드디어 진도에 도착했다. 멀리 진도대교가 보인다. 이 도로는 18번 도로이다. 가다가 진도읍을 18km 남겨놓았다는 표지판도 보았다. 갑자기 도로가 씨X씨X하는 느낌이 났다. 진도대교를 들어서고 나서도 읍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진도대교의 아래쪽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울돌목이다. 다리는 물결을 잠재우는 현대의 마법이다.
어디를 둘러보아야 할지 가늠이 잡히질 않아 일단 진도 군청에 들렀다. 상세한 안내 팜플렛이 있었다. 우리는 세방리에 있다는 세방 낙조전망대로 가기로 했다.
군청 앞의 뜰에서 나무의 사진을 하나 찍었다. 나무 옆에 둥근 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무가 낳은 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돌깨고 나무가 나올거다.
여기저기 밭에서 배추가 보인다. 처음에는 추위에 거두질 못하여 그냥 버린 배추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남해의 배추들은 이렇게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는다. 강원도 배추가 겨울오기 전에 거두는 배추라면 남해의 배추는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는 기쁨으로 거두어들이는 배추이다. 배추의 겉은 겨울 추위에 잔뜩 움뜨린 자태로 후즐근하지만 속은 봄을 맞는 기쁨으로 노랗게 영글어가는 것이 남해의 배추이다.
배추밭 곁에서 배추 구경하다가 뜻하지 않은 봄소식을 또 만났다. 내게 이미 남쪽에서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며 그 소식을 펼쳐든 것은 봄까치꽃이었다. 꽃의 크기는 새끼 손톱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꽃은 봄맞이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항상 북쪽에선 봄이 완연해졌을 때 다른 꽃들과 뒤섞인 자리에서 만나곤 했기 때문에 봄맞이꽃이라는 그 이름이 그렇게 피부에 와닿질 않았다. 하지만 남쪽에 와보니 봄맞이꽃이라는 이름이 이 꽃에 걸맞는 이름이란 걸 실감한다.
한가지 밝혀두자면 이 꽃의 원래 이름은 개불알풀꽃이다. 열매 모양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다들 그 이름으로 부르길 주저한다. 남쪽의 진도에서 봄소식을 내밀고 있는 꽃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진도에서 이 꽃은 봄맞이꽃이었다.
하지만 그늘진 곳은 여전히 눈이었다. 눈도 사실 우리에겐 겨울이라기 보다 꽃이었다. 돌들의 사이사이로 흰색이 얹힌 풍경은 돌들만 이마를 맞대고 있는 풍경보다는 훨씬 낫다. 그나마 눈이 있어 우리는 겨울을 견딜만 했다. 그러나 봄이 몰려오는 남쪽에서 눈은 쌀쌀한 겨울 느낌이 났다.
세방 낙조전망대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3시 30분이다. 아직 빛이 많이 남아 있다. 안개 속에서 뿌옇게 산란하는 저녁 햇살을 받으며 섬들이 여기저기 떠 있었다. 섬의 이름은 솔섬, 곡섬, 납도, 잠두도이지만 이름만 챙겼을 뿐 어느 이름이 어느 섬의 것인지는 모른다. 얘, 섬들아, 너네들 이름 알아서들 찾아가라.
빛은 섬들의 머리 위쪽보다 해변으로 하얗게 몰려있었다.
운전으로 피곤한 그녀가 차에서 잠시 쉬는 동안 혼자 바닷가로 내려가 보았다. 눈높이를 바닷가로 낮추자 수평선이 위로 떠올랐다. 눈높이를 낮춘다는 것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이구나.
설을 맞아 고향으로 놀러온 사람들인가 보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계단의 끝부분에 하얗게 전설이 남아있다. 눈이 마치 파도같다. 항상 밀려와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파도가 눈을 빙자하여 훌쩍 넓이뛰기를 한 뒤에 계단 부분으로 날렵하게 착지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닷가로 내려가면 멀리서 볼 때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우선 아무리 바다가 잔잔해도 해변을 쓸고 내리며 강하거나 혹은 부드러운 선율로 귓전을 채워주는 소리가 있다. 멀리 서 있으면 바다가 쥐어주는 소리의 선물을 귀에 담을 수가 없다. 또 돌멩이를 던지며 바다와 놀 수 있다. 누구한테 돌멩이를 던졌다가는 큰 싸움 나기 일쑤이지만 바다는 돌멩이를 던져도 잘 던졌다고 하얗게 박수를 쳐준다. 다만 박수는 한번밖에 없다. 여름이라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가 된다. 바닷가에선 바다와 놀 수 있는 방법이 여러가지이다. 사람들이 바다와 놀고 있었다.
2 thoughts on “진도의 봄소식과 세방 낙조전망대 – 6일간의 설여행 Day 2-1”
>>눈높이를 낮춘다는 것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이구나.
오늘의 잠언입니다.
이쯤 되면, 경지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전망대가 높아서 한참 내려가야 하긴 했어요.
요즘은 어딜가나 풍경좋은 곳은 다 전망대가 있어서 풍경을 조망하기는 아주 좋게 되어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