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에만 해도 서른 살 이후의 삶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서른 살을 넘기면 삶이 너무 구질구질할 듯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대학 때 몇 번 내가 졸업한 학교와 다른 학교의 공모에 글을 내고 당선이 된 뒤로 글재주를 과신하게 되었다. 한 5년 정도 미친 듯이 글을 쓰면서 내 몸의 모든 얘기를 쏟아내고 나면 이 지상에 덩그러니 빈 몸이 남을 듯했고, 그러고 나서 내 빈 몸을 이 지상에 남겨놓고 세상을 뜨면 아주 깔끔하게 살다가는 삶이 될 수 있을 듯 여겨졌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정반대의 깨달음이었다. 그건 내가 미친 듯이 쏟아낼 얘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내가 썼던 글도 일종의 경작이었다. 그러니까 글은 수렵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거두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가령 내가 주로 쓰고 있는 문학평론은 시와 소설이 씨앗이다. 시인이나 소설가에겐 시와 소설의 소재들이 씨앗이 될 것이다. 타고난 재주꾼은 씨앗을 뿌리면 곧바로 거둘 작품이 무성해진다.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아니면 그냥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 씨앗이 자라 작품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내 몸은 뿌린 씨앗이 곧바로 작품으로 영글만큼 비옥하질 못했다. 나는 미친 듯이 쏟아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짜내듯이 키워내야 했고, 그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서른 이후의 삶은 상상해보지도 않았던 나는 서른을 가볍게 넘겼고 마흔을 훌쩍 지나쳤으며 급기야는 50 너머의 삶에까지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내가 서른을 눈앞에 두었을 때 나와 결혼하여 내 계획대로라면 결혼하자마자 나를 잃고 혼자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졌던 그녀는 내 재주의 비천함으로 말미암아 여지껏 나와 함께 살아가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도 내 뒤를 이어 50의 나이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50이란 나이는 정말로 적응이 안된다. 서른도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50에 적응이 어려운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50을 넘겨 살고 있다는 것은 내겐 엄청난 불운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운을 어찌 견디랴. 그것도 서른 이후로 무려 20년간이나.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운의 남자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여자의 삶은 더더욱 힘겹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불운을 무너뜨릴 모종의 획책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이번 설에 모든 것을 서울에 팽개쳐놓고 멀리 남쪽의 섬으로 떠도는 며칠간의 여행이었다. 때로 삶의 불운은 삶에 성실할 때 그 지층의 두께를 더해간다. 지금까지의 삶을 버릴 때 불현듯 삶이 새롭게 다가설 때가 있다. 우리의 기대는 그것이었다. 이번 여행이 50을 넘겨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위안의 말을 속삭여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떠났다. 남쪽, 어딘가, 우리가 가보지 않은 섬으로.
원래의 계획은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우리의 계획은 지키기 위해 세우는 것이라기보다 승용차로 떠나는 여행인데 굳이 시간에 구애받을 것이 있느냐는 우리의 느긋함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점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차의 트렁크엔 여행용 트렁크가 또다시 실렸다. 트렁크 속의 트렁크였다. 여행용 가방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각각 며칠분의 옷가지와 여행지에서 먹을 컵라면, 햇반, 그리고 반찬거리가 담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알뜰이 챙긴 것들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내가 챙긴 것은 내 몸 하나와 가는 중간중간 떠들어댈 나의 말많은 입, 그리고 내 카메라 장비들이었다. 우리의 차는 11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길동의 생태공원 앞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하남 IC에서 외곽순환고속도로로 올라섰다. 우리에게 이 도로는 도로의 명칭보다 번호로 더 익숙한 도로이다. 우리는 이 도로를 100번 도로라고 부른다. 이 도로를 타면 경부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로 쉽게 바꿔탈 수 있다. 나는 경부로 내려가다 천안에서 공주를 거쳐 군산으로 가는 길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해안고속도로를 고집했다.
내 경험상 이럴 때 고집부리다 길이 막히면 고집부린 사람이 모두 뒤집어 쓴다. 나는 서해안고속도로로 가자는 그녀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가다 보니 우리 앞에 유독물 차량이 한 대 달려가고 있다. 가만히 지나칠 내가 아니다. 나는 유독 물이라니라면서 유독과 물 사이를 슬쩍 벌려놓았다. 다른 말로 하면 하필 물이다. 하필에는 신세 한탄의 마음이 배어 있다. 왜 하필 나냐고 하면 재수없게 걸렸다는 자탄이 그 말에서 금방 묻어난다. 물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왜 하필 나는 물이냐고 하면 그 한탄의 삶은 삶에 독이 된다. 물의 경우엔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유독물이다. 당연히 마시면 죽는다. 한탄하느니 차라리 싸우는게 낫다.
유독물을 실은 차량이 우리 앞을 지나갔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필 유독 물이래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서해안고속도로로 들어서자 마자 길이 막힌다. 설날맞아 고향가는 차들을 피한다고 설날 연휴를 피해 하루 일찍 출발한 것이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난 느낌이다. 그녀가 말한다. 경부로 갈 걸 그랬나. 나는 오늘은 어디나 막힐 거라고 말했다. 가보지 않은 길의 상황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우기 딱좋은 상황이지만 그것보다 쉽게 여행길을 망치는 방법은 없다. 50을 살면서 터득한게 많다. 아마 서른 이전이었다면 그런 계산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미친 듯이 살다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오, 이번 여행, 처음은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막히는 도로에서 안내판이 붉게 핏대를 곤두 세운다. 길을 안내하는 중간중간에 간간히 우리에게 대놓고 협박이다. 졸면서 운전하면 자살 행위이고, 술먹고 운전하면 살인 행위란다. 말이야 맞는 말이라고 해도 그 말 한 마디로 도로에 죽음이 가득해진다. 졸음이나 술이나 모두 달콤한데 차와 결합되면 죽음이 된다. 잊지들 마시라. 차가 편리해도 달콤한 죽음을 싣고 달리나니.
1시간 정도를 밀린 끝에 드디어 길이 뚫렸다. 10km 정도가 막힌다고 했는데 그러면 1시간 정도를 날리게 되는 거구나. 왜 막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막히는 길의 지루함은 갖고 간 음악과 설을 팽개치고 떠나는 여행의 들뜬 마음이 멀찌감치 밀어내 주었다. 서해대교를 건너자 온통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이 나타났다. 날이 흐려있었지만 흐린게 아니라 오늘은 하늘도 안개로 온통 하얀 빛이었다.
원래는 군산으로 간 뒤에 한일강제병탄 시기의 일본식 건축물이 남아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다가 진도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늦은 출발과 고속도로의 정체로 길이 막히면서 대천을 지날 때쯤 시간이 오후 3시쯤으로 밀려와 있었다. 그리고 대천은 우리에게 그녀의 선배 이름을 강하게 환기시켰다. 대천에서 약국을 하고 있는 선미 선배이다.
나에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선배이다. 결혼전 우리가 대천으로 여행을 갔을 때 저녁을 사주고 방을 잡아주었던 선배였다. 그때 나는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에 여행을 가면 그냥 올라오지 않겠다고 말했었고, 그녀는 대천에 가면 선미 선배가 있으니까 그 선배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선배는 방까지 잡아주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날 저녁 그녀에게 말했다. 지켜주기는 커녕 늑대굴이 집어던져주고 가는 아주 고마운 선배라고.
대천이란 이름이 환기시킨 그 선배의 이름은 우리 첫 행선지를 대천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우리의 차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대천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옆차를 보니 바퀴가 동그라미에 걸렸다. 아마 출발하면 동그라미가 바퀴에 묻어갈거다. 인생이란게 그런 거다. 가끔 우연히 서로에게 걸려들고, 그러고 나면 평생 얽혀서 사는 거다. 바퀴가 둥근 것은 모두 어느 길에서 동그라미에 걸려 그 동그라미에 얽혔기 때문이다. 네모에 걸린 바퀴도 있지 않겠냐구? 그건 바퀴의 인연이 아니다. 차가 갑자기 너무 삐걱댄다면 운나쁘게도 네모에 걸린 것이다.
결혼 전에 한번 가고 결혼하고 나서 한참 뒤에 또 둘이 한번 갔었다. 그리고 글이 막혀 답답하던 어느 날 그냥 혼자 내려가서 선미 선배의 얼굴을 본 뒤에 바닷가로 나가 바다 바람을 맞으며 글의 초고를 써갖고 올라온 적이 있었다.
모두 세 번 걸음했던 약국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약국만 기억에 있다. 약국도 사실은 이름만 기억에 선명하다. 풍경은 잘 떠오르질 않는다. 기억은 흐릿해지면서 주변을 모두 바다로 만든다. 그러면 선명하게 남은 기억 하나가 그 흐릿한 바다 위로 둥둥 떠서 섬이 된다. 한내약국은 그 자리에 섬처럼 떠 있었다. 섬을 찾아가는 우리는 마치 섬처럼 떠있는 선미 선배의 약국 앞에 섰다.
그녀의 선배와 그녀가 같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서울 돌아와서 사진을 보고는 둘이 자매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미 선배,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많이 고마웠어요. 또 먹여주고, 재워주다니.
약국이 많이 바빴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고 있었다. 조금 얘기를 나누다가 점심삼아 선미 선배가 내주는 떡을 해치웠다. 그리고는 나중에 저녁을 같이하자는 말을 남기고 낙조를 보고 다시 오겠다며 약국을 나왔다. 약국에 들른 손님의 언질을 따라 오천항으로 가다가 눈에 덮인 저수지를 만났다. 낚시꾼들이 얼음을 뚫고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수지의 얼음판으로 들어가 얼음 위로 얼굴을 내민 연밥과 연대궁을 쫓아다녔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주 주저주저했다. 음, 그래도 자기 몸무게는 알고 있구나. 어쨌거나 얼음은 두꺼워 그녀도 너끈하게 감내해 주었다.
얼음판 위에선 연잎이 얼음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면 연밥은 거의 모두가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 세상을 엿보고 있었다.
연꽃 가로등이다. 연꽃 가로등이 오늘은 세상을 하얗게 밝혀놓았다. 물론 물결이 찰랑이고 있을 때는 조명이 달라진다.
연대궁 하나가 무척이나 피곤했나 보다. 팔을 베고 아주 느긋한 자세로 눈밭에 누웠다.
넘어가는 저녁 햇살이 연대궁의 그림자를 밀면서 눈밭에서 줄줄이 그림자가 그어졌다. 연대궁들이 그림자를 날리며 달리는 듯했다.
오천항에선 귀여운 강아지를 한 마리 만났다. 근데 녀석이 잔뜩 인상이다.
–개에게도 초상권있다구요. 개의 개권을 존중해 주세요.
물론 내가 그 얘기를 들어주었을리가 없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며 나는 굴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해가 막 지고 있었다. 좋은 촬영 지점은 송도라는 섬 같았다. 물론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판단 착오를 하여 그만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우리가 들어가야할 길은 바로 눈앞의 뻘 건너편에 있는 또다른 길이었다. 길을 잘 들었다면 아마도 바다로 지는 해를 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바다로 지는 해의 낙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서울 떠나 처음 마주하는 저녁 해가 우리에게 안녕을 고하며 바로 눈앞의 작은 산너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근처에 보령화력발전소가 있어서 공기는 무척 탁하게 느껴졌다. 곧바로 길을 빠져나와 대천으로 내려가다 송학리의 바닷가에 차를 세웠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 군데군데 물이 남아있었고, 그 물속으로 갯벌의 물결 문양이 불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는 누가 불꽃을 상상했겠는가.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끝까지 살아보는 거다.
멀리 섬하나가 보인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난 진빵섬이라 이름붙였다. 물론 생긴 모양 때문이었다. 물빠지면 섬까지 걸어갈 수 있는 듯 보였다.
바닷가의 길을 달려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결혼 전에 그녀와 한여름에 처음으로 여행을 왔던 해수욕장이다. 물론 그때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다. 밤의 해변을 인공의 조명이 밝혀주고 있었다. 멀리 하얀 파도가 있는 부분이 바다이고, 그곳까지 하얗게 펼쳐져 있는 부분은 조명을 받은 모래밭이다.
발자국의 사진이 어떻게 보면 튀어나와 보이고, 어떻게 보면 안으로 들어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여야 정상이다. 모래밭이기도 하지만 일부가 갯벌이어서 부드럽게 몸무게를 받아주었다. 격렬한 포옹이 아니라 부드러운 포옹 같았다.
내 그림자가 이중으로 겹친다. 비추는 조명이 둘이라서 그렇다. 때로 조명 때문에 그림자가 양쪽으로 갈라서기도 했다. 빛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빛이 많으면 내가 분열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한적했는데 갑자기 해변이 사람들로 붐빈다. 시간은 7시를 15분 남겨놓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이 해변을 끝에서 끝까지 걸었었다. 상당히 길었던 기억이다. 뒤로 아득하게 물러나 보니 뭍은 환한 불빛으로 제자리에 꼼짝않고 주저 앉아 있었고, 바다는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그 불빛을 향해 끊임없이 몰려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몰려가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 그곳에 불을 환하게 밝힌 뭍이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기다려도, 끊임없이 몰려오는 듯 하면서도 한번도 와서 안기지 않는 거리,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우리는 어느 해 여름, 그 바다와 뭍에서 놀았었다. 물론 우리 둘은 하나로 섞여서 놀았다.
바다 가까이 들어갈 때는 물이 없는 곳을 골라 조심조심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갯벌에 걸쳐놓은 밧줄을 타고 나왔다. 뭍으로 나오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몰려가도 몰려가도 갈 수 닿을 수 없는 바다의 파도소리가 내 몸에 가득했다. 파도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뭍에 닿아있었다.
선미 선배가 저녁으로 해물찜을 사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재워주었다. 둘은 거의 새벽 3시까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코를 골면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8 thoughts on “서해 고정리의 낙조와 대천해수욕장 – 6일간의 설여행 Day 1”
전 아무리 봐도 발자국이 튀어 나와 보이는데.. 제 눈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자기도 걷고 싶다면 발자국이 애쓴건지..
저도 처음에는 항상 그래요.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또 들어가 있어요.
밑에서 세번째 발자국이 들어가 보이면 그때부터는 또 절대로 튀어나오질 않는 듯 싶어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어요. ㅋㅋ
여행의 오프닝이 좋습니다.
글도 일종의 경작이라면 풀어놓으신 말들이 와닿는군요.
설연휴에 장남부부께서 어찌 이런 여행을 감행하셨는지 일단 박수보내드리고요^^
곳곳에 지인이 있어서 여행이 더 좋으셨을듯 합니다.
인공조명이라지만 대천밤바닷가의 색이 참 근사하군요.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 두마리를 낳았는데
하나는 작고 예뻐서 ‘이쁜이’, 다른 하나는 크고 못생겨서 ‘보신이’라 이름 지었는데
저 인상쓴 강아지보니 보신이 생각이 문득 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갔다 와서 아는 사람들에게 여행 얘기했더니 서울에서 좀 살다가 나중에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서 한달씩 돌아가면서 살자고 하더군요.
돌아오고 보니 그냥 청산도로 곧장 가서 그곳에서 내내 묵다 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담에는 보길도나 목포에서 가는 섬으로 가보려구요.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고맙소.^^
운전하느라 수고하셨소.
우리 둘다 소됐다. ㅋㅋ
와~ 멋진 설여행을 다녀오셨네요.
이 글은 짜내는 게 아니라 미친듯이 쏟아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얼음판 연 사진은 처음 보는데, 신기하군요.
남쪽이 확실히 따뜻하더군요.
꽃도 보았어요.
정말 봄이 오긴 오는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