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을 돌아나온 우리는 진도에 왔으니 바다가 갈라진다는 신비의 바닷길을 한번 가보자고 했다. 물론 아직 바다가 갈라지는 시기는 아니다. 그냥 이곳에 왔으니 그곳에 한번 들러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선지는 수시로 변했다. 신비의 바닷길로 가는 중에 우리의 걸음은 두 번이나 멈추었다. 처음 멈춘 곳은 남도석성이었다.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성이라고 하며 지금의 상태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성으로 들어가며 놀란 것 중의 하나가 성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라보니 성안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직 성안에서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주민들을 새로운 주거지로 내보내고 성은 옛모습 그대로 복원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앞쪽으로 파헤쳐진 부분은 문화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다.
왜구의 노략질에 맞선 성이라면 앞쪽으로 바다가 있을 법한데 앞은 높은 산이다. 성곽에 올랐을 때는 전혀 보질 못했는데 지도에서 살펴보니 우리가 차로 타고 왔던 길의 바로 옆까지 바닷물이 밀고 들어오는 갯벌이 있다.
어느 집 마당의 한켠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자고 있다. 고양이는 자고 개들은 낯선 사람들을 보고 컹컹 짖어댔다. 나는 개들을 놀렸다. 짖으면 똥개, 안짖으면 진돗개. 실제로 진돗개로 보이는 개들은 낯선 사람이라고 무조건 짖지를 않았다. 다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지켜볼 뿐이었다.
앗, 이렇게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정말 갯벌이 보이긴 보인다. 내가 서 있는 지점은 성의 오른쪽 끝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왼쪽을 바라보고 찍은 이 사진의 위쪽 귀퉁이를 보면 한쪽으로 바닷물이 밀고 들어오는 갯벌이 약간 보인다. 왜 성곽에 올랐을 때는 저 곳이 안보였나 모르겠다.
성곽에 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성곽의 그늘을 따라 놓여있는 하얀 잔설과 푸릇푸릇한 봄마늘이었다.
사다리 하나가 담장 위에 올라가 누워 있다. 매일 위로 오르는 사람들을 올려주었던 사다리가 어느 날 자신도 담장 위로 올라보고 싶었나 보다. 담장 위로 올라간 사다리가 올라간 김에 아예 담장 위에 누워버렸다 보다.
모서리를 돌면 무엇이 있을까. 직각의 모서리는 언듯보면 끊긴 듯 보이지만 도달하고 나면 길이 훤히 트이는 부분이다. 이 담쟁이는 모서리 뒤쪽을 궁금해하며 길을 간 것일까. 모서리는 그 모서리를 마주하고 있는 자에겐 양쪽이 다 보이는 위치이지만 모서리의 한쪽으로 서 있는 자에겐 이어져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다. 모서리에서 각을 꺾어 길을 간 담쟁이에게 눈길이 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모서리까지 막힌 길은 모서리에선 갑자기 전망이 트인다. 눈앞에 보이는 끊긴 길이 길의 끝이 아니라 모서리일 수 있다. 포기하면 영영 볼 수 없는 탁트인 길이 그곳에서 또 새로 시작될 수 있다. 모서리인지, 길의 끝인지는 가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담쟁이는 모서리를 길의 끝으로 여긴 것이 아님에 분명해 보였다.
원래는 나무로 된 커다란 출입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둥글게 파여진 흔적이 바로 문의 기둥이 놓였던 자리로 보인다. 아마도 복원이 되면 성문도 다시 설치될 것이다.
성곽의 남쪽 부분은 동쪽에서 끊겨 있었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북쪽 부분을 거닐어 본다. 중간의 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성의 세월을 오랫 동안 지켜본 나무일 것이다. 성안의 세월이 나뭇가지에 하나하나 새겨지고 그 이야기를 나무 밑에 앉아서 나무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려 쌓은 성이니 끔찍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내가 나무라면 아마도 지금의 평화가 좋을 뿐, 그때의 기억은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무가 말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그 끔찍한 기억을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봉순씨댁이다. 여자 이름 같지만 남자분이다. 집은 낡아 보이지만 텔레비젼 안테나와 뒤뜰의 에어콘이 이 집이 수용하고 있는 현대 문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집이 감당하고 있는 오랜 세월은 문명과 담을 쌓고 있을 듯하지만 이 집은 묘하게 문명과 공존하고 있다.
내외분과 이웃에서 놀러온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계셨고 지나는 길에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보상은 받았지만 어디로 옮겨가야 하는지 막막하다고 하셨다. 이곳의 삶도 이미 문화인데 굳이 살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흔적이 거의 없어진 옛날로 이곳을 되돌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성곽만 보수하고 옆에 박물관 같은 것을 하나 지어 그 옛날의 모습을 그곳에 복원하는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보기엔 성안에 정착한 삶도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소중한 문화 같았다.
이봉순씨댁의 마루에 내걸린 메주이다. 풍경이 정겹다. 설을 맞아 고향을 찾아온 누군가가 할아버지에게 송만씨 댁을 물었다. 그러자 이봉순 할아버지가 송만씨 집을 일러주며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이고 또 가장 효자라고 말해주었다. 지금은 지워져버린 유적이 문화가 아니라 사실은 이렇게 동네를 훤히 꿰뚫고 있는게 우리의 살아있는 문화가 아닐까 싶었다. 죽은 문화를 복원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를 잘 보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치게 된 남도석성이었다. 하지만 보상을 받고 옮겨간 곳에선 또 질긴 생명력으로 새로운 삶들을 꾸려가리라.
4 thoughts on “진도의 남도석성 – 6일간의 설여행 Day 3-5”
나는 공주산성 생각이 나서 싫더라구.
사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 오니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함만큼 여러가지 혜택을 주면서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더라구.
물론 이건 완전히 관광객의 입장이긴 하지만 말이야.
공주산성에 갔을 때 사람들이 다 떠난 휑한 산성을 보는데
산성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가까운 남한산성처럼 카페도 있고 주점도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풍경이면 더 좋지 않을까.
그게 참 애매모호한 듯.
사람들 없는 성도 그렇고.. 살아도 또 그렇고.
성에 올라서면 일단 성안의 집들은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이 안되더라. 훤히 다 들여다보이니.
남한산성은 워낙 커서 성곽에서 집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잖어.
규모에서 상대가 안되는 듯.
안동 하회마을처럼 살면서 관광지화된 곳도 별로 인상이 안좋았어. 온마을이 온통 식당으로 변한 인상이었으니까. 이게 답이 쉽지 않은 듯 보여.
성곽은 보수하되 사는 사람들은 놔두고 가까운 옆에 박물관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싶더라는.
삼사십 년 전 서울에서도 볼 수 있던 정겨운 추억의 물건들을 봅니다.
얼기설기 만든 사다리며, 새끼줄로 매단 메주는 집집마다 볼 수 있더랬죠.
마당 풍경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학이 있는 이들이 보수와 보존을 고민하고 치밀하게 해나가면 좋을 텐데요.
상상이 안가요.
서울도 저랬다고 하니…
사람들 분위기가 나뉘어 있는 듯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옮겨가서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옮겨가는게 걱정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