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창을 낸 것일까.
버젓이 방문이 있고,
방문을 열면 멀리까지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엔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바깥을 내다보려고 낸 창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게 보기엔 창이 너무 높이 나 있었다.
바깥을 내다보려면
발돋음을 해도 창턱에 가까스로 시선이 걸리는 높은 높이였다.
고리는 더 높이 걸려 있어 의자를 놓지 않고는 창을 열기 어려워 보였다.
창이 높이 있으면 그것은 창이라기보다
창이 난 그 방의 숨구멍 같아 보인다.
내가 방안에서 몸을 세웠을 때,
내 상반신이 자연스럽게 창의 절반 이상을 넘어가야
그것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답다.
발돋움을 했을 때 겨우 시선이 걸릴락 말락하는 높은 창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라기 보다
오히려 창이 난 그 방에 누군가 갇혀 있다는 느낌을 더 먼저 가져다준다.
왜 버젓이 방문을 갖춘 방에 그렇게 높이 창을 낸 것일까.
집이나 가정은 어찌보면 열려있으면서도 갇힌 공간이다.
우리는 집이 있어 그곳에서 세상으로 나가고 들며 안정적으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안정은 그 안의 성원들에게 암암리에 많은 규제를 요구한다.
그 규제가 제한없이 풀리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집안을 가리켜 그냥 집안이라 부르지 않고
콩가루 집안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난 실제로 그런 집안에서 콩가루가 날리는지의 여부는 확인해본 적이 없다.
콩가루가 날리고 안날리고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말은 들으면 별로 느낌이 안좋다.
종종 말은 그렇다.
콩가루 집안이 5대에 걸쳐 콩가루를 팔고 있는 콩가루 전문 가정을 가리키거나
항상 콩가루를 애용하여 드디어 콩가루가 그 집안을 가리키는 애칭으로 사용되게 된 경우가 아니라
막되먹은 집안이란 말의 다른 별칭으로 사용되면서
말을 통한 사회적 제재의 한 양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집안에 콩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암암리에 애를 쓰게 마련이다.
그때 집은 자유의 모태가 아니라, 사실은 교묘한 규제의 성채이다.
그 규제를 잘 감내하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규제가 숨을 막는다는 느낌이 들면
그때부터 집은 열려있으나 갇혀있는 곳이 되고 만다.
왜 그렇게 창을 높이 냈을까.
아마도 집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 창을 열어두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창은 세상을 보기 보다는
바람과 별빛을 위해 마련해둔 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창으론 바람이 드나들고 별빛이 찾아왔을 것이다.
방문을 열면 세상의 눈이 있고,
그 세상의 눈을 이유로 들어 스스로를 규제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방안에 높이 난 그 창을 열고 바람이나 별빛 속으로 떠나는 여행엔
아무 규제도 없었을 것이다.
집에 높이 창을 하나 내고 싶다.
가끔 바람과 별빛만 드나들도록 그 창을 열어두고 싶다.
6 thoughts on “창”
혹시, 저 창은 안에서 밖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보기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쌍방향 인터페이스~ ^^;;;
그럼 감시창?
담에 갔을 때 창의 저편으로 가봐야지.
집…가족……창문. 그리고 세상밖..
저에게 저 창문은 그저 높아만 보입니다.
전 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날아가고 싶어하고.
그런 제모습에 가족들은 자꾸만 밖을 보지 말라고 하시네요.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일까요.^^;;
동원님의 연속 포스팅을 보면서
가족간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흠. 우선은 창문부터 열어야겠습니다.^^
이 노래를 알지 모르겠는데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더 느껴보자
라는 구절이 있는 노래가 있었어요. 이 노래의 제목이 <행복의 나라>죠. 그러니 일단 창문을 열어놓아요. 그럼 바람이 행복의 나라를 가져다 줄거예요.
음 느낌 좋습니다.
작은창 하나로도 이렇게 멋있는 글을 쓰시는분이군요.
저 창을 보는 순간..저도 같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다녀오셨나 봅니다….좋은곳 찾아 여행을 많이하시는듯합니다.
8월 21일, 그러니까 지난 주 월요일에 갔었어요.
화요일은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가더라도 그 날은 피하시길.
지하철로 가시면 충무로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되요.